서울 문묘 및 성균관 (서울 )

서울 문묘 및 성균관 전경
서울 문묘 및 성균관 전경
건축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전기 공자와 중국 · 우리나라 유학자를 모신 문묘. 성균관건물.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전기 공자와 중국 · 우리나라 유학자를 모신 문묘. 성균관건물.
개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묘는 공자(孔子) 즉 문선왕(文宣王)의 묘당(廟堂)으로서,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를 주로 하여 증자(曾子) · 맹자(孟子) · 안자(顔子) · 자사(子思) 등 4성(四聖)을 배향하고 다시 10철(哲)과 6현(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동서 양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 · 당(唐) · 송(宋) · 원대(元代)의 현인(賢人)과 우리나라의 18명현 등 112명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대성전(大成殿) · 명륜당(明倫堂) · 동무(東廡) · 서무(西廡) · 삼문(三門) 등 모두 5동이다. 문묘의 동 · 서 양재(兩齋)를 일명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변천

문묘는 1397년(태조 6)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398년에 준공되었다. 이때 대성전을 비롯하여 그 일곽에 있는 동무 · 서무, 그리고 묘후(廟後)의 학사(學舍)인 명륜당과 협실(夾室), 명륜당 동쪽의 청랑(廳廊) 등 모두 96칸이 지어졌다.

그러나 창건된 지 2년 만인 1400년(정종 2) 불에 타, 1407년(태종 7)에 재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또 다시 불타 버렸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1601∼1602년(선조 34∼35)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1603∼1604년(선조 36∼37)에 동무 · 서무 · 신문(神門) · 중문(中門)을, 1606년(39)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 서재(西齋)를 중건 확충하였다. 1626년에(인조 4)에 정록청(正錄廳) · 존경각(尊敬閣) · 양현고(養賢庫) 등을 재건하였으며, 1869년(고종 6)에 보수하였다.

내용

문묘는 소위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로, 남쪽의 대성전 일곽과 그 뒤편의 명륜당 일곽,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즉, 대성전 일곽은 문묘시설의 건물군이 있고 명륜당 일곽은 교학시설(敎學施設)의 건물군이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이 있는 구역은 남향한 신문(神門)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무 · 서무가 길게 남북방향으로 대칭을 이루면서 배치되고, 그 북쪽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대성전이 있으며, 서무 북쪽으로 제기고(祭器庫) · 잡사(雜舍) 등이 있고, 동무 북쪽으로는 동삼문(東三門)이 있어 외부로 통하게 되어 있다.

명륜당 구역은 대성전 일곽과 담장으로 분리된 북쪽에 있는데, 명륜당은 대성전 정북쪽에 있고 그 당의 남쪽 좌우로 동재(東齋) · 서재(西齋)가 장랑(長廊)을 이루면서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또한, 동재의 동편에는 식당이 있으며 그 위쪽으로 창고 · 육일각(六一閣) · 잡사 등이 있고, 명륜당 북동쪽으로는 존경각(尊經閣) · 향관청(享官廳)이 있다. 명륜당의 서북쪽으로는 비천당(丕闡堂)이 있으며 그 뒤쪽에 계성사(啓聖祠)가 별도로 있었다.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 · 맹자 · 안자 · 자사 등 4대 성인[四聖]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 옆면 4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전면의 한 칸은 개방한 툇간(退間)이며 실은 15칸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다포계(多包系) 공포(栱包)를 갖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이다. 건물 내부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 · 10철 · 송조6현과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대성전 앞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동무 ·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이곳에는 원래 공자의 70제자와 우리나라 및 중국의 제현(諸賢) 112위를 종향(從享)하였으나,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대성전에 모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 외에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묻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조촐한 납도리 양식의 집이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문, 홑처마의 익공집이며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높은 장대석(長臺石) 기단 위에 세워지고 중앙칸 및 양 협칸에도 2짝의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되어 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중당(中堂)과 좌우익실(左右翼室)이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중당은 맞배지붕으로 구성되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지만, 익실이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있다. 즉,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로 위계(位階)를 나타내는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이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의 중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이 좌우의 익실은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날개처럼 중당에 붙어 모두 21칸으로 된 긴 집이다.

지붕의 모양은 솟을형식인데 중당이 높은 맞배지붕으로 되고 그 옆의 익실 지붕이 조금 낮게 맞배지붕으로 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주고 있다. 공포는 중당이 이익공(二翼工), 익실이 초익공(初翼工)이며 중당은 주간에 화반(華盤)을 올려놓았고 익실은 소로(小爐)짜임만이 보인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 · 서재는 기숙사 공간으로,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특징

모든 건물이 장식을 배제한 간결한 모습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동시에 담당하던 곳이자, 17세기에 지어진 건물이 현존하고 있는 곳으로서 한국유학사와 건축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서울의 문화재』1(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3)
『서울·경기도의 향교 건축』(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서울특별시사』고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서울문묘 대성전 실측보고」(강봉진, 『건축』12,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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