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필사본이 전래되고 있으며, 『지리산 쌍계사기』, 『송고승전』, 『경덕전등록』, 덕이본(德異本) 『육조단경』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신라 성덕왕 때 당나라의 혜능 대사를 만나보기를 원했던 삼법 스님이 당에 유학 갔을 때에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무덤을 찾아 머리를 모셔와 석함(石函)에 넣어 이곳 땅 밑에 안치했다는 것이다. 그 후 신라 민애왕 때 진감 선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 영당이라 이름했다. 현존하는 7층 석탑은 1800년대에 용당 스님이 주변에 있던 목암사의 석탑을 용당 스님이 옮겨와 석함(石函)위에 세운 것인데, 이후 육조정상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성덕왕 때(702∼737) 낭주군(朗州郡: 현재 전라남도 영암군)의 운암사의 승려 삼법(三法)스님은 육조 혜능대사의 도(道)와 덕을 사모하고 있었으나 당나라 현종 개원 2년(714)에 입적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친견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고 한스러워 했다. 그때 금마국 미륵사의 규창(圭晶)이라는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육조 혜능대사의 『법보단경』 초본을 보게 되었다.
삼법 스님은 향을 사르고 공경히 단경을 읽어보니 마치 혜능대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구구 절절이 감명받고 깨닫게 되어 기쁨과 슬픔이 말할 수 없이 교차되었다. 그런데 단경에서 혜능대사가 "내가 입적한 후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법 스님은 혜능 스님이 이미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내 힘으로 이 일을 도모하여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이 되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묘사(靈妙寺)의 비구니 법정(法淨)스님을 찾아가 이 일을 이야기하고, "만약에 혜능의 두상을 모셔다가 우리나라에 잘 모시고 봉안하여 향화로 공양한다면 국가에 많은 부처님의 복락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고 하니 법정은 즉시 2만금을 희사하여 이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돈을 받고 돌아온 즉시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들어갔다. 이때가 개원 10년(722) 5월이었다. 3개월 후 소주(韶州) 보림사에 이르러 육조탑에 나아가 무수히 절을 올리고 마음속 깊이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도록 빌었는데 7일째 되는 날 밤에 한 줄기의 빛이 육조탑 꼭대기에 머물다가 동쪽 하늘을 가로 질러 뻗쳤다.
삼법스님은 광채가 상서로워 우러러 예배를 드리면서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감응에 기뻐했다. 그러나 주변 형세를 보니 혜능의 정상을 갖고 간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계책을 다 궁리해 보았지만 자기와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울적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백율사 스님인 대비(大悲)선사가 마침 홍주 개원사 보현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법스님은 곧바로 대비선사를 찾아가 간직하고 있던 계획을 고백하니 그는 기뻐하면서 “내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에 감탑(龕塔)을 만들 때 나 역시 자세하게 관찰했습니다만, 예언으로 훈계하였기 때문에 얇은 철판과 보포를 겹겹으로 감싸고 탑문도 단단하게 봉함하였고 엄중히 감시하며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여간 뛰어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손을 댈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당시 개원사에는 용기와 힘이 뛰어난 장정만(張淨滿)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이 일을 말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부모님이 돌아갔다는 부음의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김대비는 삼법 스님과 상의하여 1만금을 건네 주면서 부조하였더니 정만은 그 돈을 받고 감격하였다. 집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김대비는 그에게 육조대사의 정상을 탈취해 올 일을 은밀히 부탁하니, 정만은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는 위험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데, 어찌 정만은 "하물며 이 정도의 일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보림사를 향하여 떠나갔다.
그 이튿날 장정만은 보림사의 육조탑에 도착하여 한밤중 사람이 없는 조용한 틈을 타서 탑의 문을 열고 몰래 육조혜능의 정상을 탈취하여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개원사로 돌아와 대비스님에게 드렸다. 그로부터 삼법과 대비스님은 그 날 밤에 육조 혜능의 정상을 짊어지고 낮에는 숨고 밤에 길을 재촉하여 달려서 항주에 도착하여 배를 타게 되었고 그 후 당진에 도착하여 운암사로 돌아왔다. 이 일을 비밀로 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대비선사와 함께 영묘사로 가서 법정비구니에게 보여 드렸다. 법정비구니는 환희하고 예배하면서 맞이하여 삼가 신중히 육조의 정상을 조심스럽게 단상에 모시고 공양 올리고 예배를 드렸다. 삼법화상은 꿈속에서 오색의 구름이 은은하게 비치는 가운데 한 노스님이 나타나서 "나의 머리가 이 땅에 돌아옴은 불국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꿈을 꾸었다. 삼법화상은 그 이튿날 대비스님과 동쪽 지리산으로 갔다. 이때가 12월이었다. 눈이 온산에 쌓여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런데 사슴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니 동굴에 석문이 있었고 문안에는 샘물이 솟고 있었는데 마치 봄 날씨 같았다. 이곳에 육조의 정상을 임시로 봉안하고 장차 탑을 세워 모시기로 하였다. 그 날 밤에 그 노스님이 또 꿈에 나타나 “탑을 세워 현창하지 말라. 비문을 만들어 기록하거나 새기지 말라. 무명 무상이 제일이니라” 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쪼개고 다듬어 함을 만들어 깊숙히 묻어 안치하였다.
그리고 한 곳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선정을 닦았다. 김대비도 몇 개월 뒤에 백율사로 돌아가 오로지 선학을 닦다가 그해 입적하였다. 그리고 삼법스님도 17년 뒤에 입적하였다. 삼법스님은 운암사에서 출가하였으므로 입적하고 운암사로 돌아가 장례를 치루었다.
그 뒤 이 암자는 불에 타 없어져 버렸는데, 뒤에 진감국사가 이 터에 다시 창건하고 육조 혜능의 정상을 봉안한 그 위에 육조진전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