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제목은 ‘관도곽공희설씨묘지명(館陶郭公姬薛氏墓誌銘)’이며,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진자앙(陳子昻)이 지었다.
이 묘지명은 진자앙의 문집인 『진습유집(陳拾遺集)』과 『진백옥집(陳伯玉集)』, 그리고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문원영화(文苑英華)』,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호간에 글자의 출입이 많으며, 후대 문헌에 채록된 것보다 진자앙의 문집류가 정본(正本)으로 생각된다.
묘지명을 보면 설요는 대략 660년경에 태어났다. 15세인 675년경 아버지가 죽자 산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20세 무렵인 680년경에 「반속요(返俗謠)」를 짓고 하산해 당시의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던 곽진(郭震, 字는 元振)의 첩으로 10년 정도 살다가 693년에 사망, 통천현(通泉縣) 혜선사(惠善寺) 근처에 묻혔다.
묘지명의 자료적 가치는 문학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측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9세기 이전까지의 한시(漢詩) 작가·작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비록 중국에서 살았지만 신라의 후예인 설요라는 한 여류시인의 생애와 그가 남긴 「반속요」라는 작품의 존재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한편 『전당시(全唐詩)』에는 묘지명에서 뽑은 작가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반속요」가 수록되어 있고, 한문학계에서는 이미 문학사와 각종 논문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전당시』는 잘못 기록된 후대 문헌의 묘지명을 참고했으므로 그 자체 중요한 오류가 있었고, 그것의 오류는 최근까지 답습되어 왔다.
묘지명의 정본을 통해서 보면 설요의 아버지는 『전당시』의 기록과는 달리 설승충(薛承沖)이 아니라 설영충(薛永沖)이며, 「반속요」라는 작품의 원형도 ‘化雲心兮思淑貞/洞寂滅兮不見人/搖草芳兮思芬蒕/將奈何兮靑春(화운심혜사숙정/동적멸혜불견인/요초방혜사분온/장내하혜청춘)’이 아니라 ‘化雲心兮思淑眞/洞寂滅兮不見人/瑤草芳兮思芬蒕/將奈何兮靑春(화운심혜사숙진/동적멸혜불견인/요초방혜사분온/장내하혜청춘)’인 것이다.
이 묘지명은 신라의 정치·사회·경제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자료 가치를 가진다. 신라인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설영충 가문의 신분 강등을 통해 신라 사회의 신분문제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식읍제(食邑制)의 실시 시기와 변화 양상을 가늠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사학자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설요의 아버지가 『삼국사기』 열전의 설계두(薛罽頭)와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묘지명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두 사람은 별개의 인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