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학안(學顔), 호는 쌍천(雙泉) 혹은 학천(鶴泉).
전하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생애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파문사우록(坡門師友錄)』에 성여학이 어렸을 때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배웠다는 내용이 있다. 기타 자료를 참고하면, 그는 경기지방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1615년(광해군 7) 6월조에 성여학을 시학교관(詩學敎官)으로 임명한 기록이 보인다. 당시에 60세였다고 하니 생년은 1555년(명종 10)경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 문집에 ‘아배이오년팔십(兒輩以吾年八十)……’이라는 시제가 있는데, 이것을 보면 80세 이상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졸년은 1635년(인조 13) 이후가 될 것이다.
성여학은 나이 50세에 비로소 진사가 되어 매우 가난하게 살았고 변변한 관직을 갖지 못했지만, 시에 관하여서는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유몽인(柳夢寅)이 이정구(李庭龜)에게 그를 천거하여 “노초충성습(露草蟲聲濕 ; 이슬 맺혀 풀벌레는 젖은 채 울고), 풍지조몽위(風枝鳥夢危 ; 바람 불자 가지 위 꿈꾸는 새 위험하구나.)”라는 훌륭한 시를 지은 성여학을 어찌 헛되이 늙게 버려둘 수 있겠느냐고 하여, 시학교관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예조에서 왕에게 우리나라는 중국사신과 외교석상에 시율창수가 매우 중요한데 근래에는 시학이 전폐되어 여염간의 초학들이 시학을 배울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적임자로 성여학을 추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학교관은 임시직으로 마련된 하찮은 자리로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유몽인은 성여학의 불우를 슬퍼해서 “그의 시는 공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한담소삭(寒淡蕭索: 차고 맑으면서 쓸쓸함)해서 높고 귀한 사람의 기상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 유독 시가 그를 궁하게 만들었겠는가? 시 또한 그 궁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성여학의 시세계를 적절히 지적한 말인데, 성여학의 시는 성당(盛唐)의 시인 맹교(孟郊)·가도(賈島)·한산(寒山) 등을 배웠다고 평가된다. 그의 시가 공교하지만 한담(寒淡)하고 소삭(蕭索)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의 기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문적으로 시작활동을 하던 시인이 위치할 현실기반이 없었던 것에 기인하는 곤궁한 생활이 시정(詩情)에 반영된 결과이다. 성여학은 당시에 시학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을 받았으나 평생을 매우 곤궁하게 살았다. 성여학의 저작으로 시집인 『학천집(鶴泉集)』 이외에 민간 소화를 수집 기록한 『속어면순(續御眠楯)』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