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휴는 일찍부터 개성적인 그림을 스스로 시도하며 서병오와 허백련의 전통적인 화풍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1949년의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동양화부에 수묵 풍경화 「신청(新晴)」이 입선하였고, 1953년의 제2회전에서는 「상조(霜朝)」, 그리고 제3회전 때에는 「험로(險路)」가 입선하면서 동양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5년의 제4회전에서 부당하게 낙선을 당한 뒤로는 국전을 외면해 버리고 독자적 작품 활동으로 일관했다.
1955년 이후 지속적인 개인전을 통해 대담한 붓놀림과 분방한 수묵화 정신의 산수 풍경화와 부엉이 · 게 · 물고기 · 호랑이 등의 광범위한 주제로 두드러진 개성적 작풍을 부각시켰다. 그는 1950년대 이응로(李應魯)의 필법에서 받은 영향을 자신만의 현대적이고 독특한 수묵화로 소화해내었으며,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조선일보사 주최의 『현대작가초대전』에 이응로와 더불어 초대될 만큼 큰 평가를 받았다.
1957년 뉴욕의 월드하우스갤러리가 꾸민 『한국현대작가전』과 1958년 샌프란시스코미술관이 기획한 『아시아미술전』에 초대받아 출품한 것도 현대적 수묵화가로서 두드러진 위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8년부터는 중견 및 중진 전통 화가들이 새로운 창작성 지향을 내세웠던 백양회(白陽會)에 영입되어 1978년에 그 회원 작품전이 중단될 때까지 김기창(金基昶) · 이유태(李惟台) 등과 함께 중심적인 회원으로 참가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더욱 활달하고 생동적인 필법과 묵법(墨法)을 보였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호방한 운필(運筆)과 표현의 단순화 및 색채의 선명한 도입으로 노익장(老益壯)의 예술 역량을 분출시켰다.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성, 종래의 준법(皴法: 산수화에서 산이나 돌에 주름을 그려 입체감을 나타내는 화법)을 파괴한 새로운 기법, 적(赤)․황(黃)․청(靑) 삼원색의 대비 등 ‘탈(脫)전통의 조형’으로 현대 한국 동양화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홍익대학 미술학부 강사(1965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1974년)를 역임하였다.
1978년 중앙일보사의 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상을 수상했으며 1987년호암갤러리에서 『풍곡 성재휴 회고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