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문집 ()

소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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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헌
조선 전기의 문신, 노수신의 시 · 기 · 차 · 묘표 등을 수록한 시문집.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노수신의 시 · 기 · 차 · 묘표 등을 수록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이 문집의 간행 경위는 1652년(효종 3)에 조경(趙絅)이 쓴 후서(後序)에 잘 나타나 있다. 초간본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노수신의 아들 노복성(盧復城)이 중간한 것을 증손자 노경명(盧景命)이 내외집(內外集)으로 간행하였다고 조경은 적고 있다. 본집과 내집 끝에 붙어 있는 노준명(盧峻命)이 지은 발기(跋記)도 대략 후서와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소재문집』의 제1차 간행은 노준명의 큰할아버지에 의해 1602년(선조 35)에 이루어졌고, 이 초간본의 판본은 속리산에 두었다가 1615년(광해군 7)에 불에 타 없어졌다. 이에 노준명의 할아버지가 다시 판본을 만든 바 있는데, 이것을 손자인 노준명이 매서(妹壻)인 심대부(沈大孚)와 함께 교정을 보았고, 이것을 가지고 노준명의 동생인 노경명이 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소재문집』이다.

서지적 사항

10권 8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1책으로 되어 있는 총목록이 앞에 있고, 권1에서부터 권6까지는 오언과 칠언의 형식을 띠고 있는 시가 주로 실려 있다. 이 시들은 율시(律詩)·배율(排律)·절구(絶句)·고시(古詩) 등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자가 관동 지방을 기행하며 만나는 풍물이나 거기서 느낀 감상을 피력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시들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는 대개 현실의 복잡한 사건들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탈속한 경지이다. 또한, 산사(山寺) 선방(禪房)에 대한 애호의 감정도 이들 시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차제경근축(次題敬謹軸)」의 서두인 “나는 유자(儒者)도 아니요 선사(禪師)도 아니라, 평생 바라기는 인간의 인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었는데(我不是儒 不是禪, 平生願棄人間緣)”라는 글귀는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권7에는 「시습잠(時習箴)」·「교의정부우찬성이황서(敎議政府右贊成李滉書)」·「황화집서(皇華集序)」·「회재선생집서(晦齋先生集序)」·「문산집서(文山集序)」·「포은집서(圃隱集序)」·「차부(車賦)」·「구사어삼대지하유공불호명론(求士於三代之下惟恐不好名論)」 등 잠(箴)·찬(贊)·축(祝)·교서·서(序)·발(跋)·기(記)·제문·과제(科製)가 실려 있다. 권8에는 「청선입지소(請先立志疏)」를 비롯한 16편의 소, 차(箚) 11편, 전(箋) 6편, 사면(辭免) 29편이 실려 있다.

권9에는 「이공행장(李公行狀)」과 묘표 2편, 「이탄수선생묘지명(李灘叟先生墓誌銘)」 등이 실려 있다. 권10에는 「정공신도비명(鄭公神道碑銘)」·「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명(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허초당엽신도비명(許草堂曄神道碑銘)」 등과 갈명(碣銘), 저자의 자명(自銘), 그리고 조경의 후서가 있다.

제6책은 부록으로 「소재선생세계도(蘇齋先生世系圖)」·「소재선생연보」·「연보부록」·「행장」이 있다. 제7책과 제8책은 내집으로, 제7책에는 내집의 목록에 이어 내집 상편으로 「시강록(侍講錄)」·「초창록 草創錄」이 있다. 제8책은 내집 하편으로 「구색록(懼塞錄)」·「문답록(問答錄)」·「양정록일(養正錄一)」(정단몽(程端蒙)이 찬(撰)한 것을 노수신이 자훈(字訓)하였다)·「양정록이」(이언적이 찬(撰)한 것을 노수신이 소의(疏義)하였다)·「서기록(庶幾錄)」 등이 있다.

노수신은 성균관전적과 병조좌랑을 거쳐 수찬으로 있을 때 독서에 전념하였다. 이 때 서당에 들어 이황(李滉)과 같이 도학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적 견해는 거경궁리(居敬窮理)로서 경(敬)을 상당히 강조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는 내집에 수록되어 있는 「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로서, 경은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외면을 바르게 하는’ 의(義)와 연계되어 있다.

권7의 「옥산서원제액찬(玉山書院題額贊)」에서 해립재(偕立齋)의 액찬(額贊)을 보면, “경은 바르고 의는 방정하니 안과 밖이 서로 교섭한다. 오직 이것을 붙잡아서 잊지 않으면 천덕이 빛나리라(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弗忘, 天德之光).”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그가 내적 규범으로서의 경을 중시함과 똑같은 비중으로 외적 규범으로서의 의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외적 행위와 실천의 영역을 중시한 학자였다.

「시습잠」에서는 “성인의 학문에서 힘쓰는 절목은 그 대요가 지(知)·행(行)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聖門用功節目, 其大要不過曰知與行而已).”라 하여 유학의 본령이 지·행에 있음을 단언하였다. 지는 심(心)에서 닦아지고, 행은 신(身)에서 닦아지는데, 그러한 수양의 방법으로는 시습(時習)이 있다. 심에서 시습을 행하면 지가 정일(精一)해져서 심은 언제나 이치에서 떠나지 않게 되고, 신에서 시습을 하면 행이 바르게 되어 몸은 언제나 실사(實事)로부터 떠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시습은 중요한 개념이 되고, 그의 체계에 있어서 이러한 수양의 한 방법으로서의 시습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경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나흠순(羅欽順)과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된다. 그는 나흠순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계승하고 있으며, 도심(道心)을 체(體)로, 인심(人心)을 용(用)으로 보는 인심도심관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인심도심체용설(人心道心體用說)은 이항(李恒)·노진(盧禛)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규장각한국도서해제(奎章閣韓國圖書解題)』(서울대학교도서관, 1979)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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