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주로 선실(禪室)로 사용되었지만, 조선 말기에는 수선사(修禪社)에서 정진하는 선객(禪客)들이 공양하는 곳이나 응진전(應眞殿)의 일을 맡은 임원들이 묵는 노전(爐殿)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남쪽을 향해 자리한 건물의 왼쪽 2칸은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온돌방에는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 있고 천장은 종이천장이지만, 부엌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어서 지붕 밑의 가구(架構)가 모두 보인다. 곧 대들보는 툇마루와 방 사이에 세운 고주(高柱)에서 뒷면의 평주(平柱)에 걸쳐 통보[通樑]로 걸렸으며, 그 위에는 한쪽에 짧은 기둥인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고주와 함께 종보[宗樑]를 받치게 하였다. 건물의 옆면에는 고주 2개를 세워서 종보를 받치도록 한 다음, 종보 위에 화반(花盤) 모양의 대공(臺工)을 얹어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고주에서 평주에 이르는 툇마루 윗부분에는 퇴보[退樑]가 걸려 있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놓였는데, 제일 아래로 기둥 머리에 꽂힌 첨차(檐遮)부터 짜올라갔으며, 외목(外目)도리를 받친 행공(行工)첨차 외에는 좌우로 짜올리지 않았다. 건물 안의 살미첨차는 위아래의 것이 합쳐져 보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인 보아지[樑奉]로 되었는데, 옆면에는 덩굴 무늬[唐草文]가 조각되었다. 이러한 공포의 구조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주심포(柱心包)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양식이지만, 기둥 머리에 꽂힌 첨차의 모습은 경내에 자리한 국사전(國師殿)의 첨차처럼 이미 변형된 상태이다.
부엌칸의 지붕 위에는 조그마한 맞배지붕을 올린 네모난 환기 구멍이 나 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자 요사(寮舍)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