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올린 전형적인 주심포(柱心包)계 건물로, 11줄의 도리를 걸친 11량(梁)의 가구(架構)를 갖추었다.
건물은 곱게 다듬은 긴 댓돌을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은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의 좌우에는 건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네모나게 다듬은 주춧돌의 윗면에는 기둥을 받치는 둥근 기둥자리가 낮게 마련되어 있다. 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정도가 뚜렷하지만, 건물 옆면의 가운데기둥은 단면이 네모나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이 둘러져 있고, 네 모서리기둥과 창방이 맞물려 있는 위치에는 앞면과 뒷면 쪽으로만 첨차(檐遮)를 끼워 놓았다. 첨차는 기둥머리 위에 짜인 쇠서[牛舌] 모양의 제공(諸工)을 받치고 있는데, 제공의 끝부분 위에는 짧은 장여를 놓아 외목(外目)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기둥머리 위의 첨차는 뜬장여와 장여, 주심(柱心)도리를 차례대로 받치는데, 뜬장여는 앞면 창방 위의 포벽(包壁)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편 옆면의 가구는 건물을 설계할 때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결구(結構)한 모습을 보여준다. 곧 창방 위의 유연한 맞배지붕 처마선 아래에 보이는 박공(牔栱) 부분의 구성은 참으로 일품이다. 협간(夾間) 중에 앞면 쪽에는 외짝의 빗살문을 달아서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창방 위쪽의 기둥머리에는 덩굴 무늬인 당초문(唐草紋)이 이어진 파련(波蓮) 모양의 받침을 놓아서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충량(衝樑)을 받았으며, 그 위에는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얹어 고주(高柱) 윗몸에서부터 나온 가로 부재를 받쳤다. 또한 그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전달하는 동자 기둥을 받치는 보인 우미량(牛尾樑)이 놓여 있는데, 지붕의 무게가 마루보 밑의 우미량에서 대들보 위에 얹힌 우미량으로 전달되고, 다시 파련대공으로 받치고 있는 우미량으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우미량의 율동적인 구성은 마루보 위쪽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솟을합장의 곡선미, 2중량(二重樑)의 중량감있는 곡면(曲面)과 더불어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부재 사이의 작은 벽에는 수생화도(水生畵圖)·나한도(羅漢圖)·소불삼례도(小佛三禮圖)·극락조도(極樂鳥圖) 등의 불화(佛畵)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건립된 불교건물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불화는 지금은 모두 없어진 채, 벽은 노란색을 칠한 빈 벽으로 되어 있다.
건물 앞면의 3칸에는 모두 3짝의 빗살문이 달렸고, 뒷면에는 양쪽 칸에 창을 설치하고서 가운데칸에는 널빤지로 만든 판장문(板長門)을 두었다. 건물 안의 바닥에는 원래 전돌이 깔려 있었지만 지금은 우물마루가 덮여 있고, 뒤쪽벽의 가운데 고주 사이는 막아서 불화를 그리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놓았다. 불단은 3개로, 가운데에 6각형 불단이 높게 자리하고 있으며, 양쪽에는 약간 낮은 4각형 불단이 위치해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은 서까래가 모두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1937년에 건물을 뜯어서 수리할 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 건물이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건립 연도가 확실한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이 건물의 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 내지 후기에 건립된 건물에 대한 편년이 시도되었다. 그 결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962년 지정) 등이 더 오래된 건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제작 연도가 명확하고 형태미가 뛰어난 한국 목조건축사상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