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수천리 참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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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19년 3·1운동에 대한 보복만행으로 일본군대가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천리(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에 난입하여 방화, 살상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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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에 대한 보복만행으로 일본군대가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천리(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에 난입하여 방화, 살상한 사건.
내용

이 곳은 대학살사건이 발생한 향남면 제암리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1919년 4월 3일 장안면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날 오후 9시 장안면 덕정리 뒷산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호응하여 인근촌락 여기저기에서 만세소리가 일어났다. 봉화는 장안면 전체로 퍼져나가 사면이 봉화로 장식되었다. 장안면의 어느 촌락이고 봉화와 동시에 만세를 부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6일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무렵, 일본군대를 수천리 마을에 침투시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초가지붕에 불을 질렀다. 집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싸여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에는 온 마을이 불바다였다.

이에 사람들은 재빨리 불을 끄려고 하였지만 일본군인들은 마을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 불을 끄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이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회당과 민가 34호가 불에 탔으며, 불을 끄려고갔던 마을사람 1명이 사살되고 여러 사람이 부상당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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