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경2년 고령사명 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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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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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의 반자.
내용

1213년(강종 2) 주조. 지름 38.5cm, 옆너비 9.5cm.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이 반자는 13세기의 주금장(鑄金匠)이었던 한중서(韓仲敍)라는 장인이 만든 작품이다.

한중서는 이 작품 외에도 내소사종(來蘇寺鐘, 1222년)·신룡사종(新龍寺鐘, 1238년, 부산시립박물관 소장)·복천사반자(福泉寺飯子, 1238년)·진주 옥천사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 1252년) 등의 범종과 반자를 제작하였던 당시로서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장인이었음이 확인된다.

반자의 전체적인 외형은 원반형으로서 측면의 끝이 후면에서 안으로 접혀 좁은 전을 형성하고, 그 내부를 공명구(共鳴口)처럼 넓게 뚫은 일반적인 형식의 금고이다. 고면(鼓面)은 3줄의 동심원으로 4구 구획하여 가장 중심에 당좌구(撞座區)를 만들었다. 이 당좌구에는 1+6개의 연과(蓮顆)와 그 주위를 두른 국화형테두리 장식이 있으며, 바깥에는 간엽(間葉)이 첨가된 12중엽의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한가운데의 연과만을 원권(圓圈)으로 두르고 나머지 6개의 연과를 둥글게 배치한 뒤, 그 주위를 국화형 테두리로 장식하는 이와 같은 형식의 당좌문은, 같은 시기에 제작된 범종·당좌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한중서의 작품에서 이러한 당좌형식이 오랜 기간 동일한 모습으로 계속 사용된 것은 당시에 동일한 문양판이 계속 유존된 점을 반영해 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중구(中區)에는 문양이 없는 대신, 외구에 쌍구체(雙鉤體)로 구성된 19개의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섬세하게 시문하였다. 이처럼 외구에 시문된 여의두문은 12∼13세기에 제작된 향완·정병·향합 등에 널리 쓰여진 장식문양과 동일한 형태로서, 금고의 경우 이 작품과 경선사정우2년명금고(景禪寺貞祐二年銘金鼓, 1214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양표현이다.

한편, 측면에는 구름모양으로 굴곡을 이룬 고리가 3개 달렸고 이곳을 돌아가며 ‘崇慶二年甲戌年三月五日壽寧宮主房侍衛軍公節亦聖壽天長國泰民安兩主各保千秋兼及亡妻聰明女離苦得樂聞聲悟道之願 鑄成飯子一隻重三十斤懸於高嶺寺永充功德者同願 同寺住持惠成 同房侍衛軍仲敍(숭경2년갑술년3월5일수령궁주방시위군공절역성수천장국태민안양주각보천추겸급망처총명녀이고득락문성오도지원 주성반자1척중30근현어고령사영충공덕자동원 동사주지혜성 동방시위군중서)’라고 음각명을 새겨놓았다.

즉 이 반자는 1213년에 공주인 수령궁주방의 시위군 공절(公節)이 국가의 평안과 궁주 양위(兩位), 그리고 죽은 아내를 위해 발원한 반자로서 30근의 중량을 들여 고령사에 시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자는 같은 수령궁주방의 시위군 중서(仲敍) 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관계(官階) 없이 이름만을 기록한 점은 그가 처음에는 시위군에 소속되어 병역의 의무를 치르는 장인에 불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관장으로서 자리잡아 대장(大匠)의 직급을 받게 되고 나중에 별장동정(別匠同正)이라는 무신계의 정7품으로까지 진급하게 되는 그의 행적을 엿볼 수 있다. 명문 중 간지 ‘갑술’은 ‘계유(癸酉)’의 잘못이다.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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