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철 ()

정치·법제
인물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교수, 법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철학자 · 교육자 · 관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고종 40)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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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교수, 법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철학자 · 교육자 · 관료.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출생.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31년 졸업한 뒤에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조수(助手)로 일하였는데, 이 무렵 조선사회사정연구소 회원이 되었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지도를 받아 마르크스경제학 및 철학을 연구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회지인 『신흥』에 헤겔철학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연구부 주최 강연회에서 ‘최근 철학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고, 1934년에는 <실존철학의 의의>와 <조선연구의 방법론> 제목의 논문을 각각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제2회 철학연구회 공개강연회에 참석하여 ‘현상학적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문예비평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에는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였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회지인 『신흥』에 <역사철학의 기초론>을 또다시 발표하였다. 한때 기자 생활을 하였고, 일제 말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를 지냈으며, 그 뒤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조선학술원 서기국 위원이 되었으며, 이때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독립동맹 환영준비위원회 선전부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남조선신민당에 가입하였고, 학술원 기관지 『학술』에 논문 <역사의 발전과 개인의 실천>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개최된 문학자대회에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특별보고를 하였고, 1947년 2월 조선과학자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현하의 과학 정세와 과학자의 임무’를 발표하였다.

1948년 3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철학’을 출간하였고, 같은 해 4월 ‘남북회담 지지 108인 성명’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57년 9월 법제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노년에는 숙청대상으로 몰려 19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자유주의자로 비판받았고, 이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당대표자회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석상에서 들고 일어난 반김정일(金正日)세력 숙청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일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가 1945년 12월 월북하였고, 1946년 김일성대학 부교수를, 1950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같은 해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강좌장에 임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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