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월 5일 제주도 애월면 신엄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운동 및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 사업에 관여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7년 7월 재일본조선인연맹 시즈오카(靜岡)현 본부 위원장을 시작으로 1951년 11월 민전(民戰) 중앙본부 서기장, 1953년 11월 민전 중앙본부 의장단을 거쳤다. 1955년 5월 조총련 중앙사무국 국장에 임명되면서 조총련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56년 5월오사카(大阪)현 본부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60년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72년 2월 재일본조선인 인권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는 등 조총련 인권신장에 큰 노력을 쏟았다. 그 공로로 1972년 4월 북한 최고의 영예칭호인 ‘노력영웅’ 칭호를 수상하였고, 1976년 1월 ‘국기훈장 제1급’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1978년 4월에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89년 4월 약 30년간 맡아온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 부의장 자리를 내놓고 북한 노동당의 우당인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방북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이때쯤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북한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던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1년 1월 ‘노력영웅’ 칭호를 또다시 받는 등 능력을 인정받아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1972년 12월 제5기 대의원에, 1977년 11월 제6기 대의원에 잇따라 재선되었다. 1982년 2월에는 제7기 대의원(평남 강동), 1986년 11월에는 제8기 대의원(평양 비파) 1990년 4월에는 제9기 대의원(어은)에 선출되었다.
1970년대부터 북한 의회대표단을 인솔해 국제의원연맹(IPU) 총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 9월 동경에서 열린 제61차 IPU총회에 북한의회대표단 부단장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1975년 3월에는 스리랑카에서 열린 IPU이사회에 대표단 고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또 1975년 9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IPU총회에는 의회대표단원으로, 1976년 4월과 1977년 4월에도 의회대표단원으로 멕시코와 호주에서 열린 IPU이사회에 참석하였다. 1993년 1월 23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당시 강성산(姜成山) 총리, 이종옥(李鍾玉) 부주석, 김영남(金永南) 부총리 겸 외교부장 등 모두 21명으로 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중앙인민위원회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사회민주당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였다. 김일성(金日成) 주석도 사망 하루 뒤인 1월 24일 그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