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규 ()

정치·법제
인물
해방 이후 조선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교육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7년
사망 연도
1995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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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해방 이후 조선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교육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60년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의 전신인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중앙위원회 의장을 시작으로 조총련 일을 시작하였다.

1961년 5월 조선대학교 부학장을 시작으로 학계에 몸을 담기 시작해 1967년 11월 조선대학교 부학장, 1968년 4월 조선대학교 학장 등을 거치는 등 7년여에 걸쳐 조총련 교육 부문을 담당하였다.

그 뒤 1973년 1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되었고, 1983년 6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1989년 9월과 1992년 5월 조총련 제1부의장에 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995년 9월 제17차 조총련 전체대회에서 제1부의장에 재선되었으나 같은 달 21일 일본에서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1995년 10월 13일 북한으로 옮겨져 평양 형제산구역의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당시 안장식에는 양형섭(楊亨燮)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용순(金容淳) 당 중앙위원회 비서, 장철(張澈) 부총리, 김수익 해외동포영접총국장 등이 참석하였다.

그는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며 조총련을 대표해 왔다. 1972년 12월 재일과학자대표 단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였고, 1980년 9월에는 북한 정권수립행사에 조총련대표단을 인솔해 평양을 찾았다.

또 1982년 12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사회주의헌법’ 발표 기념 중앙대회에 참석하였고, 1984년 4월에는 김일성(金日成) 주석 생일을 앞두고 조총련 축하단장으로 평양을 찾았다. 특히 1994년 4월 김일성 주석 82회 생일을 기념해 열린 중앙보고대회에서 연설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김 주석 사망 후인 1995년 7월 5일 김일성 사망 1주기 행사에 참석차 북한을 찾는 등 수시로 북한을 오가며 조총련의 대표해 왔다.

1960년 8월 북한 당국으로부터 ‘국기훈장 제3급’을 수상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상훈을 받았다. 1963년 9월에는 ‘국기훈장 제2급’을, 1972년 11월에는 ‘국기훈장 제1급’을, 1982년 3월에는 북한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상하였다.

19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12월에는 북한 최고의 영예칭호인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에 선출된 이후 1972년 12월 제5기 대의원, 1977년 11월 제6기 대의원, 1982년 2월 제7기 대의원(강원도 원산), 1986년 11월 제8기 대의원(황북 서흥), 1990년 4월 제9기 대의원(내문)으로 선출, 사망할 때까지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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