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신수(申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다. 조목(趙穆)·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정계가 혼란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1623년(인조 1) 5월에 명나라 희종(熹宗)의 등극을 기념하는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 문필에 관한 일을 맡은 관직)을 거쳐 1627년 사간원정언에 이어 곧 지평(持平)으로 승임되었다.
이해 6월 병조판서 이귀(李貴)의 전횡(專橫)을 배척하는 소를 올려 이귀의 미움을 샀으며 부사직(副司直)으로 전보되었다. 162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을 때, 내수사(內需司)가 진상을 과다히 강요하는 폐단을 일소하게 하라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후일 도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