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

신석호
신석호
근대사
인물
해방 이후 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 한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한 학자. 역사학자.
이칭
치암(痴菴)
이칭
寺谷修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1월 22일
사망 연도
1981년 2월 13일
본관
아주(鵝洲)
출생지
경상북도 봉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해방 이후 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 한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한 학자. 역사학자.
개설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치암(痴菴)이다. 1904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부터 홍치유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8년 4월 경북 봉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 · 1운동과 관련되어 1919년 6월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4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 1921년 3월까지 수학했다. 귀국 후 1921년 4월 중동학교에 입학, 1924년 3월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92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26년 3월 수료 후,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29년 3월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었고, 1930년 5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1937년 9월 수사관으로 승진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1930년 8월에는 청구학회의 편집위원이 되어 10년간 활동했다. 한편 1934년 진단학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1940년에는 기원2600년축전 기념장을 수여받았다.

해방 직후, 조선사편수회가 보관하고 있던 「일본공사관기록」의 원판을 소각하려 하자, 김건태와 함께 중추원 서고로 옮겨 보관했다. 이후 1945년 8월 진단학회 상임위원, 10월 조선역사협회 부회장, 12월 조선사연구회 부회장이 되었다. 1946년 1월에는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강사로 활동했고, 3월에는 국사관을 설립, 9월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3월 고려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7년 1월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수요목제정위원, 2월에는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이 되었다. 1949년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 1951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겸임했으며, 1954년 제1회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62년에는 독립유공자상훈심의위원회 위원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5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7년 12월 한국사연구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2월 13일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통령장, 1963)을 받았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치암신석호박사고희기념논총』(형설출판사, 1973)
『미군정청관보(美軍政廳官報)』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치암신석호박사약력」(『대구사학』7·8, 1973)
「신석호박사화갑기념조선시대연구특집」(『사학연구』 18, 1964)
『자유신문』(1945.12.28)
『동아일보』(1934.5.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조성운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