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울진군, 서쪽은 영주시, 남쪽은 안동시 · 영양군, 북쪽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 삼척시 · 태백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38′∼129°12′, 북위 36°44′∼37°06′에 위치한다. 면적은 1,201.48㎢이고, 인구는 3만 380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156개 행정리(72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에 있다.
태백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영향을 받아 북부에는 태백산을 비롯해 연화봉(蓮花峰, 1,053m) · 구룡산(九龍山, 1,346m) · 삼동산(三洞山, 1,178m) · 선달산(先達山, 1,236m) · 면산(綿山, 1,245m) · 옥석산(玉石山, 1,242m) 등 1,000m가 넘는 산들이 북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부에는 배바위산(968m) · 오미산(梧味山, 1,071m) · 비룡산(飛龍山, 1,129m) · 죽미산(竹美山, 907m) · 장군봉(將軍峰) 등이 솟아 있다.
서부에는 봉황산(819m) · 응방산(鷹坊山, 587m) · 대마산(大馬山, 375n) 등이, 남부에는 만리산(792m) · 문명산(文明山, 894m) · 청량산(淸凉山, 870m) · 산성산(山城山, 845m) · 미림산(美林山, 686m) 등이 에워싸고 있다.
이 밖에 각화산(覺華山, 1,177m) · 왕두산(王頭山, 1,044m) · 문수산(文殊山, 1,206m) · 화장산(華獐山, 859m) · 월암산(608m) 등 곳곳에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사이에 군소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싸여 있어서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높은 산악지대를 이룬다.
태백산은 해발 1,568m의 준산영봉(峻山靈峰)으로서 이 산을 원봉(原峰)으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전개되며, 또한 산맥을 분수령으로 낙동강이 발원해 군을 남서류하면서 지류인 석포리천(石浦里川) · 광비천(廣比川) · 재산천(才山川) 등을 합치고, 내성천(乃城川)이 군의 서부를 남서류하면서 유역에 약간의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기후는 내륙산악지대인 관계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교차가 큰 편이고 동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이 낮다. 연평균기온은 9.9℃, 1월 평균기온 -4.9℃, 8월 평균기온 22.0℃이다. 연강수량은 1,354.8㎜이며, 서리는 10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하순에 끝난다.
봉화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조사가 미미하고 문헌자료가 희소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는 이 지역이 내륙 벽지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사회에서 오랫동안 독립행정구역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이었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신라에 편입되어 757년(경덕왕 16)의 지방제도 개편 때 옥마현(玉馬縣)으로 개칭되어 선곡현(善谷縣: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과 함께 내령군(奈靈郡: 지금의 영주시)의 영현(領縣)이 되어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시)에 소속되었다는 것이다.
고려 초의 점진적인 지방제도 개편하에서 봉화현으로 개명되었고, 1018년(현종 9)안동부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말까지 계속 속현으로 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비로소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별호(別號)는 봉성(鳳城)이었다.
이 때 안동부에 소속되어 있던 물야(勿也: 지금의 물야면) · 매토(買吐) 두 부곡(部曲)을 관할영역으로 편입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이 곳을 본관으로 하는 금의(琴儀) 및 정도전(鄭道傳)과 관련되어 주목받기도 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현감이 임명되었고,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역향(逆鄕)으로 지목되어 폐지되자 문수산 동쪽 지역을 할양받아 현세(縣勢)가 확대되었다. 당시 이 곳의 토지는 척박했고, 풍속은 절검하며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호구수는 243호, 인구는 1,160명이었다.
한편, 고려 후기 이래 이 곳을 본관으로 하는 금씨(琴氏) · 정씨(鄭氏)가 중앙정계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안동지역의 사족(士族)들이 이 곳으로 이동해 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곡(酉谷)으로 이주해온 권벌(權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 서울을 거쳐 강원도에 진격한 왜군이 경상도로 남하해 오자 유종개(柳宗介) 및 윤흠신(尹欽信) · 윤흠도(尹欽道) 형제를 중심으로 의병 수백 명이 현 동쪽 소천(小川) 지역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열세에 몰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실록의 보관을 위해 사고(史庫)가 정비되자, 1606년(선조 39) 이 곳 태백산에도 사고 · 선원각(璿源閣) · 실록각(實錄閣)이 남화사지(覽華寺址) 부근에 설치되었다.
1956년내성면이 봉화면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춘양면 덕구리와 천평리가 강원도 영월군으로 편입되었으며, 소천면에 석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상운면 두월리 · 내림리가 영주군 이산면으로, 법전면 소로리가 춘양면으로 편입되는 등 행정관할구역의 조정이 있었고, 1979년 5월 1일봉화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명호면 신라리가 상운면에 편입되었으며, 소천면 석포리 · 대현리 · 승부리 및 울진군 서면의 전곡리 일부를 통합해 석포면을 설치하였다. 1991년 1월 1일봉성면의 원둔리가 봉양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4년 7월에는 춘양면 우구치1·2리를 우구치리로, 소천면 고선1·2리를 고선2리로, 고선3리를 고선1리로, 명호면 북곡1·2리를 북곡리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2000년 1월에는 석포면 대현1·2리를 대현1리로, 대현3리를 대현2리로, 재산면 현동2·4리를 현동2리로, 남면 1·2리를 남면리로, 갈산1·2리를 갈산1리로, 갈산3·4리를 갈산2리로, 상리1·2리를 상리리로, 상운면 문촌1·2리를 문촌리로 신라1·2리를 신라리로 통합하였다. 2002년 11월에는 봉화읍 포저리를 내성리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고, 이후 2004년 3월 군청사를 봉화읍 내성리 285번지에서 537번지로 옮겼다.
선사시대의 유적 가운데 고인돌은 봉화읍 도촌리,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의양리 · 소로리, 재산면 동면리 · 갈산리, 상운면 구천리 등지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상운면 신라리, 봉성면 봉성리, 재산면 동면리 · 현동리 등지에서는 간석기와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의 고분군도 물야면 북지리, 봉화읍 삼계리 · 석평리, 춘양면 소로리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산성으로는 내성산성 · 개단토성 · 소천석성 · 낙산성 · 청량산성 등이 있으며, 용산 · 당북산 · 호애산 · 태백산 등지에는 봉수대가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666년(문무왕 6) 원효(元曉)가 명호면 북곡리에 창건한 청량사,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청량사유리보전, 673년(문무왕 13) 의상(義湘)이 물야면 개단리에 창건한 축서사(鷲棲寺), 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보물, 1989년 지정), 봉화 축서사 괘불탱(보물, 2003년 지정)이 있다.
또, 676년 원효가 춘양면 석현리에 창건한 각화사(覺華寺)와 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각화사귀부 · 삼층석탑 · 석구 등도 있고, 그 밖에 199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구가암 · 홍제사(弘濟寺) · 중대사와 대당사지 · 소천사지 · 남화사지 · 지림사지 등이 있다.
불상으로는 신라통일 직후의 작품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1980년 지정) · 오전리 석조아미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이 물야면에, 봉화 의양리 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 소로리석불입상 · 서동리석조여래좌상이 춘양면에 있다.
또, 봉성면에 봉화봉성리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 천성사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법전면에 소천리석조여래좌상, 재산면에 봉화동면리마애비로자나불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등의 불상이 다수 남아 있다.
이 밖에 천성사삼층석탑과 축서사삼층석탑 · 축서사석등이 있고, 특히 춘양면의 봉화서동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내부에서는 탑과 같은 모양의 토탑(土塔) 99개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천성사삼층석탑은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축서사삼층석탑과 축서사석등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또한, 춘양면 석현리에는 태백산사고지(사적, 1991년 지정), 봉화읍 유곡리에는 조선 중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권벌의 충재일기(보물, 1963년 지정)와 권벌 종가 전적(보물, 1986년 지정) · 권벌 종가 고문서(보물, 1986년 지정) · 권벌 종가 유묵(보물, 1986년 지정), 그리고 영조가 권벌의 후손에게 하사한 근사록(보물, 1963년 지정)이 전한다.
유교 유산 및 정자로는 봉화읍의 쌍벽당 종택, 화천리의 구만서원 · 몽화각, 유곡리의 서설당, 물야면의 계서당 종택, 봉성면 봉성리의 봉화향교 등이 있다. 쌍벽당 종택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구만서원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몽화각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서설당은 199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계서당 종택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봉화향교는 1990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물야면 오록리의 장암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 청간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상운면 문촌리의 무진장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구천리의 야옹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법천리의 이오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춘양면 의양리의 봉화한수정(보물, 2019년 지정), 봉화읍 거촌리의 도암정(경상북도 민속자료, 1984년 지정), 상운면 문촌리의 종선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명호면 북곡리의 청량정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봉화읍 적덕리의 두릉서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등의 문화유산이 많다.
한편 고가옥으로는, 법전면 척곡리에 봉화법전강씨종택, 봉성면 원둔리의 오고당구택, 봉화읍 거촌리의 경암헌고택, 해저리의 만회 고택 등이 있다. 봅화법전강씨종택은 1982년에, 오고당구택과 경암헌고택은 1984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만회 고택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봉화읍에는 석평리의 송석헌(경상북도 민속자료, 1991년 지정), 문단리의 빈동재사(경상북도 민속자료, 1991년 지정), 의양리의 권진사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등이 있으며, 소천면에는 분천리도토마리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94년 지정) · 분천리까치구멍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94년 지정), 상운면에는 설매리겹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94년 지정) · 설매리삼겹까치구멍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94년 지정)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명호면 풍호리의 감고당문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물야면 오전리의 봉화초고장, 봉화읍 삼계리의 봉화유기장 등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봉화초고장과 봉화유기장은 1994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또한, 봉화읍 유곡리의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사적 및 명승, 1963년 지정)을 비롯해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 등 많은 명승지가 있으며, 봉화 대현리 열목어 서식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세종 때 봉성면 봉성리에 봉화향교가 창건되었다가 1579년(선조 12) 현감 조목(趙穆)에 의해 중건되었다. 1588년(선조 21)에는 봉화읍 삼계리에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설립되어 권벌의 위패를 봉안했고 1660년(현종 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596년(선조 29)봉화읍 화천리에 구만서원(龜灣書院)이 설립되어 금인(琴靭) · 남몽오(南夢鰲) · 박선장(朴善長) · 권호신(權虎臣) 등을 배향하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고, 1967년에 복건되었다. 1804년(순조 4)물야면 수식리에 건립된 행계서원(杏溪書院)은 김강(金鋼) · 김홍제(金弘濟)를 배향하다가 1868년에 철폐되었으며, 1931년에 복건되어 김용(金湧)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밖에 도계서원(道溪書院) · 단계서원(丹溪書院) · 문산서원(文山書院) · 오천서원(梧川書院) · 동명서원(東溟書院) · 문암서원(文巖書院) · 인계서원(仁溪書院) · 도연서원(道淵書院) · 문계서원(文溪書院) 등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으나 모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0년춘양면 의양리에 설립된 사립 광성학교(廣成學校)가 최초이다. 이는 1912년에 봉화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가 다시 춘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또, 1910년봉화읍에 설립된 사립 조양학교(朝陽學校)는 1913년 내성공립보통학교(乃城公立普通學校)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봉화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사립 대성학원(大成學院) 등이 설립되어 신지식과 신문명을 수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사회 · 문화시설로 봉화공공도서관이 있어 군민들의 교육 ·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며, 지역문화복지시설로는 군민회관 1, 복지회관 10, 그리고 문화원이 1개 있다.
1965년에 개관한 봉산문화원은 향토사연구소 운영하고 봉화군 지역의 유일한 민속문화축제인 청량문화제 개최를 개최하며 다양한 문화학교를 개최하는 등 이 지역 주민들의 문화 함양을 높이는데 중심 기능을 수행한다. 도립 봉화공공도서관은 지역의 유일한 공공도서관으로서 1976년 9월에 개관하였으며, 6만 여권의 도서와 함께 최첨단 디지털 자료실까지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강좌를 열어 정보 및 평생교육센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청량산박물관은 청량산을 배경으로 한 문화유산과 자연환경, 지역홍보자료를 한 곳에 모아 전시함으로써 봉화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곳이다.
이 고장에는 특이한 민속놀이는 없으나 줄다리기 · 지신밟기 · 장치기 · 호미씻기 · 씨름 등이 세시에 따라 시행된다. 특히, 정월에는 오행점(五行占) · 상원사(上元絲)짜기 · 뱀막이놀이 등이 행해진다. 오행점은 자신의 일 년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초하룻날 나무를 바둑돌만하게 깎아서 다섯 개를 만들어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를 각각 써넣고 주문을 외우면서 한꺼번에 던져 나온 글자로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정월의 첫 묘일(卯日)에는 실을 자아서 의복을 지으면 그 사람의 명이 길어진다 하여 실을 서로 선물하는 일이 있었다. 그 실을 상원사 또는 명사(命絲, 속칭 홋실)라고 하며, 실을 주머니 끝에 차기도 했다. 상사일(上巳日)은 뱀날이라 하여 뱀막이놀이를 한다. 아이들이 뜰 안에서 새끼를 끌며 주위를 돌고 또 다른 아이가 뒤에서 회초리로 새끼를 때리며 “뱀치자.”, “뱀잡자.” 하면서 집 주위를 여러 바퀴 돈 뒤 그 새끼를 불에 태워 없애면 그 해에는 뱀이 집에 침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고장은 동제가 잘 보존되고 있는 지역으로, 166개 이에서 약 190개 동제가 행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상신은 서낭신[城隍神]으로, 당사를 세운 곳도 있고 노송이나 해묵은 느티나무를 성황으로 정한 곳도 있으며, 돌을 세워 성황으로 섬기는 곳도 있다.
특이하게 명호면 북곡리 · 관창리 등 청량산 부근에서는 고려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곳에 피신했던 공민왕과 왕비에게 제를 올리기도 하고, 호랑이를 산신으로 정해 그림을 내걸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서낭당에는 남신과 여신이라 하여 당사 · 노목 · 입석 밑에 석축을 만들고 왼새끼를 감아 새끼 사이에 한지(韓紙)를 오려서 끼워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다. 제사는 대개 음력 정월 보름 자시(子時)에 지낸다. 제관은 생기(生氣)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정하고 상주나 복인(服人), 부인이 임신 중이거나 부정한 사람은 제외시킨다.
대부분의 제의는 다른 지방과 같은 유교식 제의가 아니라 가무사제(歌舞司祭)의 마을굿 형식을 취하여 굿패라고 하는 농악대가 풍물을 친다. 삼계리에서는 제사 전까지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데, 미혼남자까지 가세한 여자측이 이기면 이 마을의 서낭신인 여신을 위로하고 제를 올렸다.
이 고장에는 자연물과 역사인물에 관한 설화, 지명유래담, 시정잡배나 효자에 얽힌 설화 등이 전한다. 석포면 대현리의 태백산에는 태백산신이 된 단종의 전설이 전해 온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 땅으로 유배된 단종에 대해 이 곳 주민들은 많은 동정을 해오던 터였다.
세조 3년 가을,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저녁 때 영월의 관아에 볼일을 보러 가는 길에 누각 앞에서 흰 말을 타고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주민들이 길가에 엎드려 인사를 하고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보았더니 단종은 말에 탄 채 태백산에 놀러간다고 대답하였다. 영월에 도착한 마을사람들은 그날 낮에 이미 단종이 시해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단종의 영혼이 태백산에 입산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 뒤부터 태백산에 단종의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전해 오게 되었다. 지금도 무속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태백산 꼭대기 부근과 태백산 아래 춘양면 서벽리 등지에 단종의 비각 또는 화폭을 걸어놓고 단종의 신령을 섬기고 있다.
또, 소천면 서천리 갯마을에는 사망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이 마을에는 사마귀와 흡사하게 생겼다 하여 사망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아들을 못 낳은 아낙이 이곳에 돌을 집어던지며 “아들이나 하나 낳게 해다오.” 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돌은 바위에 얹혀 떨어지지 않았고 그 여인은 정말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돌을 집어던져 그 주위에는 돌이 무수히 쌓이게 되었다.
남사고(南師古)는 유명한 풍수(風水)의 대가로서 그에 관한 설화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그 중 이 군에는 상운면에 묘를 잘못 쓴 설화가 전한다. 남사고는 효성이 지극하고 욕심 또한 많아서 죽은 아버지를 제대로 묻기 위해 수십 개의 묘터에 이장을 거듭하였다. 그가 이장한 곳은 하나같이 명당이어서 남사고가 묘를 파갔다 하면 곧 누군가 그 곳에 묘를 이장해서 자손이 번창하고 재물이 늘었다.
남사고는 마침내 상운면 가곡리 뒷산의 묘터를 발견하여 이장을 하고 있는데, 한 승려가 나타나 “남사고야 남사고야, 좋은 묘터 다 버리고 이 곳 찾아 묘를 쓰니 가엾구나 가엾구나.” 하고 사라졌다. 과연 묘를 쓴 남사고는 산을 내려오다가 두 다리가 부러져 즉사하고 말았다. 그는 멀리 보이는 메밀밭을 강물로 오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사고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묘 앞에 비각을 세워주었다.
법전면 풍정리 노림마을에는 북쪽 산마루에 이여송(李如松)이 깨뜨렸다는 큰 바위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가다가 이 바위를 보고는 이로 인해 조선에 명장(名將)이 날 것을 염려하여 칼을 뽑아 바위를 산산조각 내니 주변에 떼를 지어 살던 학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가 있던 자리에는 넓적한 반석이 남아 있다.
물야면에는 신의로운 진사와 백정의 설화가 전해 온다. 이곳에 가난한 진사와 부유한 백정이 살고 있었는데, 책만 읽던 진사가 가난에 쪼들리다가 백정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백정은 펄쩍 뛰며 10년 동안 가족의 뒷바라지를 할 테니 공부나 계속하라고 하였다. 약속한 10년 뒤 진사는 과거에 급제하여 감사가 되었으나 백정은 가난뱅이가 되어 감영을 찾아갔다.
그러나 감사에게 냉대를 받게 된 백정은 분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집마저 불에 타고 가족들은 온데간데 없어진 뒤였다. 감사가 사람을 시켜 불을 놓았다는 말을 듣고 백정은 원수를 갚기 위해 10년 동안 무예를 닦았다. 드디어 하산하려는데 스승이 칼 한 자루를 내주며 신중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조판서가 되어 있는 옛 진사의 집에 한밤중에 숨어들어간 백정이 이조판서 앞으로 나가는데,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이조판서가 나타나 백정을 맞이하여 방으로 들어가니 불타 죽은 줄 알았던 가족들이 기쁘게 백정을 맞아주었다. 이조판서는 10년 전에 환대를 했더라면 지금도 백정일 것이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으니 훈련대장으로 일해줄 것을 부탁하여 두 사람 모두 잘 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정만서 · 방학중 등의 시정잡배민담, 호랑이가 장가 보낸 효자의 설화, 주위 사람을 골탕 먹이는 시정잡배들과는 반대로 누구에게나 당하기만 하는 선비 정역간의 설화 등이 전한다.
이 지방에는 예로부터 다양한 민요가 전승되어왔으나 생활양식의 변화와 농경방법의 개선 등으로 많이 쇠퇴하여 현재 전승되는 것은 심심풀이로 부르거나 유흥요로 부르는 정도이다. 농업노동요인 「모내기소리」는 벌모를 심던 과거에는 여러 곳에서 많이 불렸으나 줄모를 심는 지금은 리듬이 맞지 않아 부를 수가 없고, 다만 간간이 유흥요로서 불리고 있을 뿐이다.
「모내기소리」는 원래 남녀가 섞여서 모를 심을 때 불렀던 것으로, 앞소리꾼이 메기면 뒷소리꾼들이 이를 받아 부른다. 춘양면 의양리에서는 “사래지자 광도넓다 서마지기 이논바닥, 여게꼽자 저게꼽자 집네마느래 어데꼽고, 님을보고 보선보니 임줄정이 정이없다, 남의집의 님은 달뜬듯이 돋았는데……” 하며 남녀 애욕을 은근히 풍기는 내용의 사설이 되풀이된다.
법전면 법전리에서는 “서마지기 이논빼미 모를 숨거서 장하도다. 우리부모 산소등에 모를 숨거서 장하도다. 이물꼬저물꼬 헐어놓고 쥔네양반 어디갔노, 단비혀라 손에들고 첩의방에 놀러갔네. 무슨놈의 첩이 요정해서 낮에가고 밤에가노. 낮에가면 놀라가고 밤에가면 잠자러가네.……” 하며 부부의 애정을 은근히 빗대어 웃기려는 내용으로 계속된다.
이 지방은 산악이 많아서 「밭갈이소리」와 「밭매기소리」가 더러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일찍이 쇠퇴한 듯하다. 다만, 춘양면 서벽리 큰마에 여성이 부르던 「밭매기소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은가락지 찌던손에 호맹이가 웬일인고 풀잎은야 비드니야 푸리고도 시커멓고……”와 같이 여성이 부르던 노동요는 대체로 신세한탄이 그 내용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석포면 석포리에 전승되는 베틀노래도 임을 그리워하는 사설로 이어져 있다. “세월이 허심심하여 베틀이나 놓아볼까……산명월 달밝은밤에 오작교 다늘어지고 정든님 올길 막연하구나 원앙금침 잣비개는 단둘이 빌라고 지엇지…….”
이 밖에도 「물레노래」 · 「삼삼기노래」, 땅 다질 때 부르는 「지짐소리」 · 「망께소리」 등이 전하고, 의식요인 「상두소리」, 무덤 다지는 「달구소리」 등이 전승되고 있다. 특히, 「정선아리랑」을 비롯해 「금자동아 옥자동아」 등 자장가류도 여성들 사이에 널리 전해 오고 있다.
명호면 북곡리에 전승되는 유흥요인「머루야 다래야」는 젊은층에서도 널리 회자되는 민요이다. “멀구야다래야 열지를마라 두메골큰애기 일안한단다 아주까리동박아 열지를마라 두메골갈보야 몸꼴낸다.” 유흥요는 주로 여럿이 모여 놀 때나 삼삼기할 때도 부르는데, 「시집살이노래」나 「첩의 노래」 등이 주로 불린다.
산악지대여서 임야면적이 9만 8141㏊로 총면적의 81.7%에 달하며, 총경지면적은 1만 2302㏊로 10.2%에 불과하다. 경지 중 논이 3,794㏊로 30.8%, 밭이 8,508㏊로 69.2%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저수지인 봉성면의 창평저수지(昌坪貯水池)와 재산면의 동면저수지(東面貯水池)에서 이 지역의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쌀 생산은 적은 편이고, 주요 농작물은 고구마 · 감자 · 조 · 옥수수 · 콩 등의 잡곡이다. 그 밖에 고랭지채소를 비롯해 인삼 · 산수유 · 당귀 등의 약용작물이 많이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송이버섯 · 사과 · 딸기 · 수박 · 대추 · 고추 등이 있으며, 1996년 고랭지에 시설화훼농업을 개척해 백합, 국화, 안개꽃 등을 생산하고 있다.
봉화사과는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봉화지역에서 영글기 때문에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다. 봉화토종약대추는 높은 품질에 비해 생산량이 많지 않아 가격이 다소 비싸지만, 살이 두텁고 당도가 높으며 보혈강장에 좋다. 봉화고랭지딸기는 당도가 높고 신선하며 빛깔이 곱고 알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봉화고추는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빛깔이 곱고 매운 맛과 감미가 뛰어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임야면적이 넓어 2008년 현재 입목축적량은 약 1199만 9340㎥로 풍부한 산림자원을 가지고 있다. 산림자원은 입목뿐만 아니라 무성한 임야 내에서 밤 · 호두 · 잣 · 대추 · 도토리 · 섬유연료 · 유지원료 · 버섯 · 산채 등의 임산물도 생산한다. 2007년 임산물 생산량은 종실 10만 5674㎏, 버섯 24만 920㎏, 산나물 13만 5108㎏이며, 춘양목을 활용한 관광자원도 개발하고 있다.
2008년 현재 총광구수는 87개로 이 중 26개가 가행중이고 61개는 미가행 상태이다. 광산물로는 석회석 · 아연 · 규석 등이 석포면 · 소천면에서 산출된다. 특히, 석포면 대현리에는 광산물 수출에 있어서 국내 제일의 연(鉛) · 아연 광산이 있다.
공업은 봉화읍에 제1· 제2 농공단지가 있다. 총 300.004㎢ 면적으로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으로는 전통한과인 닭실유과와 전통주, 봉화읍 삼계리에서 제작하는 반상기 · 제기 등의 봉화유기 등이 있다.
상업활동을 보면 1830년대에는 소천장(韶川場, 2·7장) · 재산장(才山場, 5·10장)이 열렸으며, 내성장(乃城場) · 창평장(昌坪場)은 10일장이었다. 1909년에는 내성장이 크게 성장하여 약초 · 대추 · 소 · 농산물 등이 거래되는 큰 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상업이 발달하여 8개의 5일장이 서게 되었고, 광복 후에는 한때 9개로 늘었다가 1960년 이후 상설점포가 증가하면서 정기시장의 사회 · 경제적 기능이 쇠퇴하였다.
1980년봉화읍에 상설시장이 개설되어 특산물의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10여 개의 농협연쇄점도 개설되었다. 2008년 현재 시장은 모두 3개로 봉화읍에 개의 일반 시장이 있고, 춘양면에 1개의 정기 시장이 있다.
도로는 국도 31호 ·35호 ·36호가 동서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철도가 군의 중앙을 지나고 있어 영동과 영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명승지가 많으며, 역사적 유물도 상당수 있어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198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명호면 북곡리의 청량산, 물야면 오전리의 오전약수탕과 개단리의 문수산 · 축서사, 봉화읍 유곡리의 석천계곡과 충재유적지, 석포면 대현리의 청옥산자연휴양림과 백천계곡이 있다.
청량산은 태백산의 지맥인 일월산(日月山)에서 서남쪽 24㎞ 지점에 용출한 영산(靈山)으로, 주봉인 의상봉(義湘峯) 정상에는 200㎡나 되는 넓은 면적에 만병초(萬病草) 등 각종 고산식물들이 자생하고 있고, 대부분이 편마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수가 아름답다.
특히, 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한 청량사와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金生窟),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오산당(吾山堂),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인 고운대(孤雲臺)와 독서당(讀書堂), 공민왕이 은신한 공민왕당(恭愍王堂)과 청량산성, 총명수 · 감로수 등의 약수, 신라시대의 사찰인 각화사 · 축서사 · 홍제사 등 이름난 곳이 많이 남아 있다.
선달산과 옥석산, 박달령과 주실령에 둘러싸인 오전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 쏘는 맛이 나며, 철 · 염소 · 칼슘 등이 함유되어 몸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수산에 있는 축서사는 6·25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리고 지금은 대웅전과 요사채만 남아 있다. 대웅전에는 보물인 석불좌상부광배가 있는데, 불상은 9세기경에 만들어진 비로자나불이고 광배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웅전 앞에는 석등이 있다.
석천계곡은 태백산지에서 발원한 물이 응방산과 옥적봉을 지나 봉화산골에서 흘러온 옥수와 합쳐지면서 봉화읍 유곡리에 펼쳐놓은 계곡으로서 가족 피서지로 적당하다. 이 계곡에는 충재 권벌의 장자인 청암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가 있다. 그 아래 닭실마을은 충재가 은거했던 곳으로 충재일기 · 근사록 · 전적 · 고문서 · 유묵 등을 보존하고 있다.
청옥산 자연휴양림은 태백산 남쪽에 있는 청옥산(靑玉山, 1,277m)의 해발 896m에 위치해 있다. 대관령보다도 4m 높은 곳이어서 아무리 무더워도 파리와 모기가 없다. 전체 규모가 1,000㏊로 좀 작은 편이지만 시설이나 숲의 밀도, 관리실태 등에서 손색이 없다. 계곡이 조금 작은 것이 흠이지만 숲이 짙어서 가뭄에도 말라붙지 않는다.
벽천계곡은 태백산에서 발원한 옥계수가 해발 650m 이상의 고원을 16㎞에 걸쳐 흐르면서 만들어낸 계곡으로, 태백산을 비롯해 연화봉 · 청옥산 · 조록바위봉 등의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계곡물이 맑고 수온이 낮다.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서식지와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원혼들을 봉안한 현불사가 있다. 이 밖에 석회동굴인 소천면의 평천동굴(坪川洞窟)과 재산면의 회곡동굴(回谷洞窟) 등이 있다.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74.32㎢, 인구 1만 63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포저리이다. 본래 안동부에 속한 내성현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내성면(乃城面)이라 하여 포저(浦底) · 송내(松內) · 호평(虎坪) 등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고종 32) 순흥군에 편입되었다. 1906년안동부에서 봉화군 내성면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거촌 · 유곡 · 황전 · 호평 등 10개 리와 수민단면(壽民丹面) · 화천면(花川面)을 합하여 내성면(乃城面)이 되었다. 1956년에 봉화면으로 개칭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2002년에 포저리가 내성리(乃城里)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동쪽에 옥적봉, 서쪽에 대마산 · 노인봉, 남쪽에 송관산 · 호골산, 북쪽에 응방산 등, 사방이 비교적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대부분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내성천이 읍의 중앙부를 남서류하여 적덕리에서 지류인 낙화암천과 합류해 남하하면서 유역에 소규모 평야를 형성해 놓았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5.42㎢로 20.7%, 임야면적은 47.29㎢로 63.6%, 기타 15.7%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9.46㎢로 61.4%, 밭은 5.96㎢로 38.6%를 차지하여 논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주산업은 유역평야에서 이루어지는 벼농사로, 평야는 협소하지만 토질이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비교적 양호하여 단위면적당 생산고가 높다. 쌀을 비롯해 보리 · 수수 · 콩 · 녹두 · 고구마 등의 작물과 수박 · 호박 · 가지 · 토마토 · 배추 · 마늘 · 파 등의 채소류, 참깨 · 땅콩 등의 특용작물이 재배되며, 사과 생산이 많다. 돼지 · 닭 등의 사육은 활성화되고 있으나 최근 수입개방으로 한우 사육은 감소하고 있다. 그 밖에 대추 · 도토리 · 버섯 · 연료 등의 임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삼계리에서는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봉화유기를 제작하고 있다. 영동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영주로 연결되는 국도가 이와 병행하며, 지방도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어 교통의 요지가 된다.
문화유적은 유곡리에 서설당과 권벌이 은거하며 도학연구에 몰두했던 청암정(靑巖亭)이 있고, 거촌리에는 도암정과 구양리사(龜陽里祠)가 있다. 또 화천리에 구만서원 · 몽화각, 삼계리에 삼계서원, 적덕리에 두릉서당, 석평리에 송석헌, 포저리와 도촌리의 산에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포저리 교육청 내에 척화비(斥和碑)가 있고, 문단리에는 충렬각(忠烈閣) · 추원사(追遠祠) · 빈동재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군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14.39㎢, 인구 2,3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도천리이다. 본래 봉화현의 지역으로 현의 남쪽이 되므로 상남면(上南面)이라 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동면(東面) · 상남면 · 하남면으로 구획되어 봉화군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 · 상남 · 하남 · 임지(林只) · 신라(新羅) 등의 5개 면을 통합해 명호면으로 개칭하였다.
면의 전지역이 높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부는 황우산(黃牛山, 601m) · 문명산 · 청량산 · 산성산을 중심으로 높은 산지를 이루고, 서부는 그보다 낮으며, 그 북부에 구릉성 산지가 나타난다. 면의 중앙을 낙동강의 상류가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으나 깊은 산간을 흐르기 때문에 평야는 거의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9.92㎢로 17.0%, 임야면적은 87.02㎢로 76.1%, 기타 6.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14㎢로 20.5%, 밭이 15.83㎢로 79.5%를 차지하여 밭농사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산간지대로서는 경작지가 넓은 편이어서 쌀 · 보리 외에 고추가 주소득원으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특산물로는 봉화토종대추, 봉화선주와 봉화된장이 유명세를 달리고 있으며 고랭지 채소가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한우 · 산양 · 닭 · 칠면조 등의 사육도 성하다. 낙동강에서는 8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육봉은어가 잘 잡힌다.
도로는 면의 동부를 강릉∼부산간 국도가 남북으로 통과하며, 도천리에서 봉화∼강구간 지방도가 갈라져 서부로 지나갈 뿐,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북곡리의 청량산에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창건한 청량사와 이황의 문인들이 창건한 오산당,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피신했던 청량산성과 공민왕을 경모하여 세운 공민왕당이 있다.
풍호리에는 구미당(九味堂), 삼동리에는 백파정(白坡亭)이 있다. 관창리에는 거대한 암반에 20여m의 물기둥이 세차게 떨어지는 관창폭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9.26㎢, 인구 3,39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록리이다. 본래 봉화현에 속하는 물야부곡으로, 조선시대에 물야면이 되어 방평(芳坪) · 북지(北枝) · 청탄(靑呑)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6년에 물야면과 수식면(水息面)의 2개 면으로 분리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두 면을 합하여 물야면이라 개칭하였다.
문수산에서 선달산을 잇는 소백산맥이 강원특별자치도와의 도계를 이루고 그 사면으로 구성된 산지지역으로 북고남저의 지형을 이룬다. 면의 중앙을 오록천(梧麓川)이 남북으로 관류하고, 유역에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7.42㎢로 15.9%, 임야면적은 84.15㎢로 77.0%, 기타 7.1%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9.54㎢로 54.8%, 밭이 7.88㎢로 45.2%를 차지하여 논농사의 비율이 약간 높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그 밖에 주요 경제 작물로는 사과, 고추, 표고버섯, 화훼 등이며, 주로 답 위주의 영농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의 특성을 살려 고랭지채소도 많이 재배한다. 축산은 오리 · 개 · 말 · 닭 등의 사육도 활발하나 한우는 수입개방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오전리에서는 담배 · 사과 · 인삼 등의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높이고 있다.
도로는 평은∼풍기간 지방도와 서벽∼오전간의 군도가 면내를 지나고 있을 뿐,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개단리의 축서사, 북지리의 마애여래좌상, 오전리의 청자도요지, 가평리의 계면당, 오록리의 청간당 · 장암정 · 노봉정이 있고, 개단리에는 문양리사(文陽里祠)가 있다.
천혜의 자원 백두대간 등 산로와 오전약수터가 있으며, 유서 깊은 축서사 등 관광자원이 있어 연간 5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오록리에는 풍산김씨(豊山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70.21㎢, 인구 2,21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법전리이다. 본래 안동부에 속한 춘양현(春陽縣)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춘양면이 되었다. 1906년봉화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단면과 동면 일부를 병합해 법전면으로 개칭하였다.
동부에는 화장산, 서부에는 갈방산(葛蒡山), 남부에는 감의산(感依山, 540m)이 솟아 있으며, 전지역이 해발 400m 전후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면의 중앙부를 법전천이 흘러 유역에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한다. 동부지역에는 운곡천(雲谷川)이 흘러 미작이 비교적 잘 되고 있다. 그러나 전지역이 고지대에 위치하여 물기가 없고 마른 편이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4.36㎢로 20.5%, 임야면적은 49.61㎢로 70.7%, 기타 8.8%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5.30㎢로 36.9%를 차지하고 밭이 9.06㎢로 63.1%를 차지하여 밭농사의 비율이 높다. 주산업은 벼농사이고, 그 밖에 수수 · 감자 · 옥수수 등의 잡곡과 수박 · 오이 · 호박 · 가지 · 고추 등의 채소류, 복숭아 등의 과실류를 재배한다. 또한, 한우와 닭 등의 가축 사육이 성하다. 법전리에서는 누에치기 · 축산 등도 겸하고 있으며, 동부의 운천곡(雲川谷)과 법전천 유역 일대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풍정리에는 일제강점기에 대규모의 광업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광되었다. 면의 동서로 영동선과 울진∼대천간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부산∼강릉간의 국도가 지나고 있어 영천 · 안동 · 울진 등지와 연결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법전리에 이오당과 경체정이 있으며, 풍정리에는 난간이 가늘고 섬세한 사덕정과 각금당(覺今堂), 소천리에는 김명흠정려각(金命欽旌閭閣)이 있다. 눌산리 고눌산마을 앞에 있는 서낭당과 300년 된 당산나무는 이 지역 촌민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법전리에는 진주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68㎢, 인구 2,27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성리이다. 본래 봉화현의 지역으로 현내면(縣內面)이라 하여 계양(桂陽) · 아동(衙洞) 등 4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북면(郡北面)과 순흥군(順興郡) 와단면(臥丹面)의 일부, 서면(西面)을 병합해 봉화군의 옛 이름을 따서 봉성면이 되었다.
내성천의 지류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관류하며, 상류에 군내 최대의 창평저수지가 있다. 하천 북부는 문수산을 정점으로 하여 그 남사면으로 된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데 비해 남부는 그보다 낮은 300∼400m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어 남북의 지형상 대조가 뚜렷하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0.95㎢로 16.4%, 임야면적은 50.85㎢로 76.3%, 기타 7.3%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83㎢로 44.1%, 밭이 6.12㎢로 55.9%를 차지하여 밭농사의 비중이 약간 높다. 벼농사를 비롯해 수수 · 호박 · 당근 · 사과 · 감 · 고추 등의 작물 재배와 말 · 닭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특히, 금봉리의 덕촌에서는 고추 · 잎담배 · 송이버섯 등이, 외삼리에서는 고추 · 사과 등이 집중 재배되어 주민소득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봉성리를 중심으로 영동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대천∼울진간 국도와 봉화∼강구간 지방도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봉성리에 석조여래입상과 봉화향교가 있으며, 금봉리에 괴당정(塊塘亭)과 천성사석탑이 있다. 창평리에 충효당(忠孝堂), 동양리에는 동명서원과 문산서원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우곡리에 물맛이 차고 시원하며 위장병을 비롯한 속병에 효과가 있는 다덕약수탕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군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58.53㎢, 인구 1,88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가곡리이다. 본래 영천군(榮川郡)의 지역으로 고려 때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이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 임지도면 또는 임지면이라 하여 중토(中土) · 상토(上土) · 신촌(新村) 등 13개 이를 관할하다가 1906년봉화군에 편입된 뒤 서면 · 임지면 · 상운면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운면 · 서면 · 임지면의 일부를 병합해 상운면이 되었다. 1973년두월(斗月) · 내림(內林) 2개 리가 영풍군 이산면에 편입되어 9개 리에서 7개 리로 감소되었다가 1983년명호면 신라리를 상운면에 편입시킴으로써 8개 리가 되었다. 2000년에는 문촌1,2리문촌리, 신라1,2리가 신라리로 통합되었다.
파리봉(497m)이 솟아 있는 면의 남서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이며, 서쪽에 치우쳐 상운천(祥雲川)이 직선상의 하곡을 이루어 남류하고 있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3.13㎢로 22.4%, 임야면적은 40.76㎢로 69.7%, 기타 7.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99㎢로 38.0%, 밭이 8.14㎢로 62.0%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교적 토질이 비옥하여 단위생산고가 높으며, 미곡 생산이 봉화 · 물야 · 법전 다음으로 많다. 그 밖에 팥 · 녹두 등의 두류와 참외 · 배추 · 당근 · 고추 등의 채소류, 참깨 · 땅콩 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된다. 축산으로는 한우 사육이 행해지며 사육두수가 봉화읍 다음으로 많다. 과수단지를 비롯하여 고추, 수박, 잎담배, 약초, 감자, 당근 등 특용작물을 집단적으로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도로는 가곡리를 중심으로 평은∼풍기간 지방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을 뿐,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구천리에 도요지와 야옹정이 있고, 문촌리에는 금원정(琴元貞)이 후학을 양성하던 낙전당(樂全堂) · 종선정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150.16㎢, 인구 2,22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포리이다. 본래 안동군 소천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봉화군에 편입되었다. 소천면 소재지와 거리가 멀어 주민의 불편이 많자 1963년에 석포1·2리와 대현리 · 승부리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석포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83년석포리 · 대현리 · 승부리와 울진군 서면 전곡리 일부를 병합해 석포면으로 되었다.
군에서 가장 험한 산악지대로, 북에는 묘봉(猫峰, 1,168m) · 면산(綿山, 1,245m) · 삼방산(三芳山, 1,175m) · 연화봉(蓮花峰, 1,053m) · 태백산(太白山, 1,568m) 등의 고봉이 병풍과 같이 솟아 강원특별자치도와의 도계를 이루며, 남서에는 청옥산 · 비룡산, 남동에는 백병산(白柄山, 1,036m) · 오미산(梧味山, 1,071m) 등의 고산이 있다.
황지에서 발원하여 장성읍을 지나온 낙동강의 본류가 면의 서부에 약간 치우쳐 감입곡류를 형성하면서 남류하고, 그 유역에 평지와 취락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지류와 면의 동부산지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2개의 지류가 면의 동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으나 평야는 거의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4.20㎢로 2.8%, 임야면적은 141.54로 94.3%, 기타 2.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0.07㎢로 1.7%, 밭이 4.13㎢로 98.3%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대부분 이뤄지고 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인 관계로 미곡 생산량은 군내 최하위이며, 메밀 · 감자 · 배추 · 양배추 · 시금치 · 무 등의 작물과 고랭지채소 재배가 성하다. 석포리의 샘터마을에는 재래종 벌이 많아 토종꿀이 많이 생산된다.
대현리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아연광산이, 석포리에는 아연을 제련하는 제련소가 있어 주민의 고용이 증대되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영동선과 부산∼강릉간 국도가 면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육송정∼원덕간의 군도가 북동부를 지나며 국도에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대현리 연화봉 중턱에 석회동굴인 평천동굴이 있고, 백천계곡에는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서식지가 있었으나 아연광산의 개발로 오염되어 열목어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대현리에 청옥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고 석포리 반야계곡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64.44㎢, 인구 2,40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동리이다. 본래 재산현(才山縣) 북쪽에 있었던 소천부곡(小川部曲)으로 안동부에 속하여 부내 · 막지고계 · 구현 등 27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 뒤 소천면이 되어 현내 · 석포 등 4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06년에 봉화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관할구역이던 석포 · 대현 · 승부의 3개 리가 석포면에 편입되었다.
험준한 산지지역으로 서쪽에는 각화산 · 왕두산 · 화장산, 남쪽에는 장군봉이 솟아 있고, 동쪽 면계를 따라 낙동강의 지류인 광비천이 흐르며,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며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면내에도 백연봉(白煙峰) · 배바위산 · 횡악산(橫岳山, 820m) · 죽미산 · 제비산(769m) 등의 고산들이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의 본류가 심한 감입곡류를 이루면서 북동 · 남서 방향으로 흘러 면을 양단하고 있으며 그 하단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2.78㎢로 4.8%, 임야면적은 240.49㎢로 91.0%, 기타 4.2%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1.63㎢로 12.8%, 밭이 11.15㎢로 87.2%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 외에 메밀 · 콩 · 팥 · 녹두 · 감자 · 옥수수 등을 주로 생산하고, 오이 · 가지 · 토마토 · 배추 · 양배추 · 무 등의 채소 재배가 활발하다. 주위의 넓은 산지를 이용하여 한우 · 말 · 산양 등의 가축 사육을 하고 있다. 또,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남회룡리의 남회마을은 고산지대의 특수한 기후로 인해 춘양목(春陽木)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약초 · 송이버섯의 수확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분천리의 중석광산에서는 질이 좋기로 유명한 중석이 대량으로 생산되었으나 폐광되었다. 면내에 영동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있으며, 울산∼신고산간 국도가 북서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대천∼울진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고선리에 홍제사가 있고, 현동리에는 부족국가시대에 반이국(潘伊國)에서 축성한 산성인 소천석성(小川石城)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4개 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6.04㎢, 인구 1,68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동리이다. 본래 덕산부곡(德山部曲)에 속해 있다가 고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이라 하여 재산현으로 승격되어 복주목(福州牧: 安東)의 속현이 되었다. 1906년봉화군에 편입, 재산면이 되어 현동(縣洞) · 동면(東面) · 남면(南面) 등 5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남면과 하남면, 춘양면 일부를 병합하였다. 2000년에는 조례1513호에 의거 현동2, 4리를 현동2리로, 남면1,2리를 남면리로, 갈산1,2리를 갈산1리로, 갈산3,4리를 갈산2리로, 상리1,2리를 상리리로 이동통합하여 총 9개 리를 구성하고 있다.
미림산 · 덕산봉(德山峰, 746m) · 조산봉(造山峰) 등이 고산지역을 형성하여 전면이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면의 서부를 북류하는 재산천이 두 지류와의 합류점 부근에서 좁은 평야를 약간 이루고 있다. 산간지역이지만 비교적 경지가 많고 비옥하며 재산천이 낙동강으로 북류하는 특이한 지역이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2.47㎢로 9.9%, 임야면적은 108.51㎢로 86.1%, 기타 4.0%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2.26㎢로 18.1%, 밭이 10.21㎢로 81.9%를 차지하여 밭농사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농업은 주곡 외에 고랭지농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축산으로는 한우 · 산양 등의 사육이 이뤄지고 있다. 특산물은 친환경농법으로 재배되는 재산 수박이 있으며 특히 고랭지 노지 재배로 임산 부산물, 농산 부산물을 발효시킨 자연산 퇴비를 사용하여 맛과 당도가 평균이상으로서 육질이 단단하고 그 맛이 뛰어난 것이 재산 수박의 특징이다.
북부에 울산∼신고산간 국도가 지나고, 안동∼현동간 지방도, 봉화∼강구간 지방도가 각각 면의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고 있으나 외곽에 치우쳐 있어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갈산리에 갈천정(葛川亭)이 있고, 동면리에 이속봉(李屬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67.29㎢, 인구 4,74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의양리이다. 본래 안동군 춘양현 지역으로 춘양면이라 하여 현동(縣洞) · 남산(南山) · 상촌(上村) 등 12개 이를 관할하다가 1906년에 봉화군으로 편입, 춘양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동면의 덕구 · 우구치 · 천평 등 5개 이와 순흥군 외단면의 일부를 병합해 다시 춘양면이 되었다. 1973년에 법전면 소로리를 편입하였다. 면의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이며 북부에는 소백산맥이 강원특별자치도와의 도계를 이루고 구룡산 · 삼동산이 솟아 있으며, 이 밖에 옥석산 · 문수산 · 형제봉 · 왕두산 · 각화산 등을 잇는 준령이 둘러싸고 있다.
그 사이에는 삼동치(三洞峙) · 등어치(登於峙) · 박달령(朴達嶺, 967m) · 주실령(朱實嶺, 1,070m) · 예배령(919m) · 흙목이재 등의 고개가 있어 인접지역과의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운곡천이 면의 중앙을 남동류하고, 연안에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으며, 취락과 교통로가 이곳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총면적 중 경지면적은 15.67㎢로 9.4%, 임야면적은 143.31㎢로 85.7%, 기타 4.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5.04㎢로 32.2%, 밭이 10.63㎢로 67.8%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도력재를 경계로 북쪽은 남한강수계이며 남쪽은 낙동강지류인 운곡천이 흐르고 있으며, 운곡천과 금정천을 경계로 동쪽은 태백산계이며 서쪽은 소백산계로 양백지역 또는 이백지역이라고 불리며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농산물과 임산물은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다.
도로는 영월∼현동간 지방도가 면의 중앙부를 북서 · 남동 방향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오전∼서벽간 군도가 이 면과 가까운 서부지역을 연결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석현리의 각화사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태백산사고지가 있으며, 서동리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이, 의양리에는 석조여래입상과 권진사택 · 한수정 · 백산정(白山亭)이, 학산리에는 와선정(臥仙亭)이 있다. 옛날에는 도심리에 도심역(道深驛)이 있었으며, 서동리에도 도연서원이 있었으나 고종 때 철폐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