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헌(公獻), 호는 경암(絅庵). 영의정 신경진(申景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준(申埈)이고, 아버지는 목사 신여식(申汝拭)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 이기조(李基條)의 딸이다. 삼촌 신여정(申汝挺)에게 입양되었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남인 권대운(權大運)·민희(閔熙) 등을 공격하였다.
1684년 강양도(江襄道: 지금의 강원도)의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도승지·대사헌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을 때, 태조의 시호를 덧붙이는 것에 반대한 박태유(朴泰維)의 상소에 편들었다 하여 삭탈관직되었다. 1688년 경기도관찰사에 기용되었다.
1694년 예조판서를 거쳐 1700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완화를 주청하였고 시무(時務) 8조를 올렸으며,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여 윤허를 얻었다. 1703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천군(平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1706년 유생 임부(林簿)로부터 앞서 1701년 세자에 대한 모해설이 있었을 때 추국(推鞫: 임금의 명에 의해 국문함.)에 참여하여 사건규명을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서로 『경암집(絅庵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