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용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이칭
명항(明恒)
혜성(彗星)
필명
장일성(張日星), 적소(赤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전라북도 부안
주요 경력
의사|조선일보사 기자|신민부 중앙 간부|반탁독립투쟁위원회 중앙집행위원
내용 요약

신일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1916년 조선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22년 잡지 『신생활』 기자로 많은 기사를 집필하였으며, 필화사건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1928년에 걸쳐 민족통일론에 대해서 ML파와 논쟁을 벌였다. 만주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인적 사항

신일용(辛日鎔)은 1894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영명(寧明)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조선총독부의학교(朝鮮總督府醫學校)에 편입하여 1916년 3월 졸업하였다. 9월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목포의 제중원(濟衆院)에서 의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8년 9월 전주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으나, 1921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약품 및 약품영업 주1규칙’ 위반으로 금고 2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주요 활동

1921년 말 서울로 올라와 김명식(金明植)의 권유로 1922년 창간한 『 신생활』 기자로 참여하였다. 창간호 이래 총 8개 호에 총 16편의 논설을 집필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소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비판, 사회주의 이상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 등을 소개하였고, 이광수(李光洙)의 ‘ 민족개조론’을 비판하였다.

한편, 신인동맹회, 무산자동맹회에 참여하였다.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특집호로 『신생활』이 발간되자 일제는 ‘신생활사 필화사건’을 일으켰는데, 사장 박희도, 주필 김명식 등과 함께 「신문지법」과 제령(制令)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23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 4월 출옥 후, 5월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13인회)에 신생활사 그룹 대표로 참가하였다. 9월에는 조선기근구제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 조선지광』 기자를 거쳐 1925년 『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였다. 『조선일보』의 정간 사태를 불러온 9월 8일자 논설 “조선과 노국(露國)의 정치적 관계”를 집필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구류 일자가 만료되어 일시 석방되었는데, 재판을 앞두고 10월 중국 상하이로 탈주하였다. 1926년 말 만주로 이주하여 광동병원을 경영하면서 서울파와 연계하던 신민부의 민정파에 참여하였다.

1927년 11월부터 1928년 1월에 걸쳐 『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당면의 제 문제”, “신간회와 그의 임무에 대한 비판-노정환 씨의 이론을 배격함”, “민족문제”, “인식 착란자의 당면 제 문제 비판-GH생의 무지를 조(嘲)함” 등의 논설을 기고하여, 안광천(安光泉)ML파 세력의 민족혁명론과 통일전선론을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안광천과 ML파로부터 ‘청산론자’라고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1928년 만주 지역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자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 진영에 참여하였고, 1929년 1월 지린〔吉林〕에서 열린 민족유일당조직동맹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4월 국민부가 성립되고,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1929년 9월 서울 상하이파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의 만주지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30년 1월 지린에서 민족주의자 김동삼(金東三)을 위원장으로 하는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在滿韓人反帝國主義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정치부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5월 30일 중국공산당이 주2 노선에 따라 무장 폭동을 일으키자, 이와 관련하여 중국 관헌에 5월과 8월에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되었다. 실제 폭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그가 구금된 것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인 현익철(玄益哲)과의 대립적 관계와 무고 때문이었다. 지린감옥에서 1년 여간 수형 생활을 하다가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지린을 점령하자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만주에서의 활동을 접고 서울로 귀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 경영권 분쟁 시 임경래 측 주필로 잠시 조선일보사에 몸담았다. 1933년 7월에 1925년 『조선일보』 사설인 “조선과 노국(露國)의 정치적 관계” 필화사건의 필자로 9년 만에 기소되었고,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에 3년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1934년 4월 여자의학전문학교 준비위원회에 상무위원으로 참여하였고, 7월에는 과학지식보급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8년 8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인쇄소 신화사를 경영하였다. 1946년 5월 29일 귀국하여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였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7년 1월 김구 중심으로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 선거에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한국민주당을 탈당하고 조소앙(趙素昻)이 결성한 사회당에 참여하여 1949년 7월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피의자 신일용 신문조서」(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일용, 「길림감옥 탈출기」(『삼천리』 4-7, 1932)

단행본

임경석, 『초기 사회주의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논문

박순섭, 「1920년대 신일용의 이론투쟁과 통일전선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94, 2018)
박종린,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신생활’」(『사림』 49, 2014)

인터넷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https://newslibrary.naver.com)
주석
주1

규칙,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    우리말샘

주2

중국의 정치가·중국공산당 지도자. 중국소년공산단 결성, 5·30사건 주도, 난창폭동 등에서 활약하고, 1928년 공산당 중앙 실권을 장악, 지도자가 되었다. 실각 후 40년대에 공산당 정부 수립과 함께 다시 복귀했고, 문화대혁명 때 자살했다.    바로가기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홍종욱(서울대학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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