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화중(華仲), 호는 한죽(寒竹).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신상(申恦)이고, 아버지는 집의 신명규(申命圭)이다. 어머니는 남호학(南好學)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효종릉의 사건으로 귀양간 아버지의 억울함을 격쟁(擊錚)하여 방환하게 한 뒤, 1686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 · 호조좌랑 · 경기도도사 · 정언(正言) 등을 거쳐 1696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 때 서문중(徐文重)이 정승이 되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복위될 때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두둔하려 했다고 탄핵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곧 병조정랑 등을 거쳐 연안부사로 나갔을 때 후궁 한 사람이 그곳의 연(蓮)밭을 떼어 받으려는 것을 막다가 체직되어 고향에 은거하였다.
다시 수원부사에 기용되어 황해감사 · 대사간 ·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개성유수로 임명되었으나 조정과 마찰을 빚어 파직되었다. 그 뒤 육조의 여러 벼슬과 도승지 ·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18년 지중추부사가 되면서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참찬과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뒤 병약하자,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하게 하려고 세제청정의 근거를 『세종실록』에서 초출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소론을 꾸짖고 동궁을 보호하는 소를 올려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영조 즉위 후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해남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