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재중(在中), 호는 석천(石泉). 아버지는 호조참판 신대우(申大羽)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정후일(鄭厚一)의 딸이다. 우리나라 양명학의 대가인 정제두(鄭齊斗)가 외증조부이다.
1809년(순조 9) 증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함을 듣고 미처 방이 붙기도 전에 달려갔으나 도중에 부음을 받았다. 삼년상을 마치면서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돈녕도정(敦寧都正)·예조참의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정약용(丁若鏞)과는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으며, 정약용은 신작의 지극한 효도에 감동하여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신작은 양명학을 공부하였고 실학으로 이를 절충하였다. 또한, 경학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노장학에도 심취하여 진실돈박(眞實敦朴)한 인간상을 노자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시차고(詩次故)』·『춘추좌씨전례(春秋左氏傳例)』·『역차고(易次故)』·『상차고(尙次故)』·『노자지략(老子旨略)』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 『시차고』는 신작이 28세 때에 강화 진강(鎭江)에서 서울교외인 현호(玄湖)로 이사하여 마포와 서강 사이에 죽리관(竹裏館)이라는 정자를 짓고 31권 12책을 완성하였으나, 소실되어 다시 모은 것이 지금 전하고 있는 『시차고』 7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