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기능보유자 이춘봉(李春逢)은 현재, 가야금 · 거문고 · 아쟁을 비롯하여 해금 · 북 · 장고 · 젓대 · 단소 · 태평소 등을 광주에서 제작하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시절에 밴드부에 들어가 연주활동을 하였고, 형(이장호)을 도와 대리석 공장을 운영하느라 돌을 자르고 구멍을 내는 기계에 익숙해 있었다.
1971년에 서울 출신의 악기 기능공을 데리고 전주에서 국악기 제작소를 차렸다. 1973년에 제작소를 광주로 옮겼고 1974년부터 광주시립국악원의 김금향(호는 취란)한테서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우면서 가야금을 수선해 주던 인연으로 서울의 김광주(金廣胄)에게 원자재를 공급해 주는 한편, 악기 제작기능의 자문을 받곤 하였다.
당시 그는 품귀상태에 있었던 오동나무 원목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고, 특수 제재한 원자재를 전국의 악기 제작자들에게 공급하였기 때문에 정읍(井邑)의 이영수(李永水)와도 교분을 맺고 그 기능을 전수받았다.
일제시대에 악기제작자로는 전주의 김명칠(金明七)과 정읍의 김붕기(金鵬基, 金鶴基라고도 부름)가 있었는데, 김광주는 아버지 김명칠에게서 기능을 전수받았으며, 이영수는 김붕기 계열이면서 또한 김광주 기능을 전수받았다.
이춘봉은 1978년도 제3회 무형문화재 전승공예전에서 거문고와 가야금 부문 특별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1983년엔 아쟁 부문 특별상, 1984년엔 해금 부문에서도 입상하였다. 이춘봉의 악기 제작 기능에서 특기할 점은 그가 대리석 공장의 경험을 토대로 오동나무를 타원형으로 켜는 톱날인 울림통 톱을 새로 고안하여 보급한 점이다.
또한 재래의 숯불 인두에 비해 온도조절이 쉬운 전기인두를 고안해 냈고, 대패도 직접 고안한 것을 쓴다. 가야금줄도 제작된 가야금에 맞추어 그때그때 소리를 가늠해 가면서 직접 합사한 줄을 쓰기 때문에 규격품이 따로 없다.
요즈음은 연주 공간이 커짐에 따라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가야금 공명통의 넓이를 2푼 내지 3푼(1㎝ 가량) 늘리는 등 끊임없이 연구하여 불편한 점들을 개량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