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정재윤(鄭在潤)·정재윤(鄭在允). 경상북도 안동 출신. 남로당 간부로 활동했던 이승엽(李承燁)의 장인이다.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학생대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와 토요회·화요회에 참가하였다.
1923년 봄에는 코르뷰로 국내부에서 활동하며 인천(仁川) 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조선공산당에 입당, 경기도당 위원을 지냈다.
1926년 6월 제2차 조공검거사건을 피해 소련으로 갔으나, 곧 북간도 연길현(延吉縣) 용지향(勇智鄕)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27년 3월경 조공 만주총국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 책임비서가 되었다.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1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수감중 옥중만세사건을 주도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이 추가되었다. 1935년 만기 출옥했다.
1945년 8월 15일 이영(李英), 정백(鄭栢), 최익한(崔益翰) 등이 중심이 된 세칭 장안파(長安派) 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공산당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2월에는 조선독립동맹 환영준비위원회 총무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여 상임위원 및 사무국 재정부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3·22사건을 계기로 포고령 위반혐의를 받아 미군정 재판에 회부되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혁명가유가족후원회 부위원장도 지냈다.
1950년 6월 유격대 제7군 남도부부대(南道富部隊) 정치위원이 되고, 7월 조선인민군 점령하에서 경기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에서 출당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