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호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임민호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임민호 전후면
근대사
인물
해방 이후 돈화현 인민정부 부현장, 돈화현 민주대동맹 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민호(珉鎬), 마호, 태갑, 춘남, 김일선, 김창섭, 민호림, 심도빈, 타로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사망 연도
1970년
출생지
함경북도 회령
정의
해방 이후 돈화현 인민정부 부현장, 돈화현 민주대동맹 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민호(珉鎬)·마호(闖鎬)·태갑(太甲)·춘남(春南)·김일선(金日善)·김창섭(金昌變)·민호림(閔虎林)·심도빈(沈道斌)·타로프.

1904년 1월 3일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가족과 함께 길림성 연길현 용정(龍井)으로 이주했다가 1913년 화룡현(和龍縣) 동성촌(東城材)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14년 장흥동(長興洞)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용정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3월 동흥중학(東興中學)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러시아공산청년동맹(콤소몰)원 이순(李淳)의 영향 아래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2년 3월 장흥동에서 사회주의 청년들과 함께 동구청년회(東球靑年會)를 결성했으며, 1923년 1월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에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그 해 4월 동흥중학을 졸업하고 용천동(龍泉洞)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소년대 및 용천동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5·1 국제노동절 기념일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 시기에 장흥동소조를 결성, 적극적인 사회주의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초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총국 건립에 참여하여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화룡현 두도구(頭道溝)에서 동아일보사 지국 기자로 일하는 한편, 고려공청 평강(平崗)구역위원회를 결성하여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5년 5월에는 두도구·평안촌(平安村)·용천동·장흥동·약수동(藥水洞)·이도구(二道溝)·사도구(四道溝)·개척촌(開拓村)의 9개 청년회를 연합해 숭신향(崇信鄕)청년연합회를 결성하고, 1926년 1월 동만청년총연맹에 숭신향청년연합회를 가맹시켰다.

같은 해 6월 10일 이순의 소개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했고, 10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위원 겸 고려공청 동만구역국 청년부장이 되었다.

1927년 5월 메이데이를 기념해 용정과 두도구에서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 때 일제의 수배를 벗어나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1928년 1월 소련 세바스토폴에서 코민테른 블라디보스토크 연락부가 주최한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 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그 해 10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 유학하였다. 1932년 5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태평양노동조합 블라디보스토크 사무국에서 활동했으며, 9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연락부로부터 함경남도 함흥·흥남 지구에 적색노동조합을 건립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였다.

이 때 『뉴스』·『노동자신문』을 발행하는 한편, 흥남화학노동조합 세포조직, 흥원통조림공장 지도그룹 등을 조직하였다. 1933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범태평양노동조합 사무국에 출석해 사업 상황을 보고하였다.

3월 3·1운동 14주년을 기념해 격문을 살포하다 함흥에서 부인 김찬해와 함께 체포되어, 1935년 6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옥중투쟁을 벌이다 징역 1년이 추가, 1940년 9월 만기 출옥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 봄까지 토목회사 동광조(東光組) 화룡현 출장소 돈화현(敦化縣) 목재채벌소에서 일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힘썼다. 1945년 봄 요시찰 인물로서 근로봉공대에 강제 징용되었다.

일제 패망 후 1945년 8월 19일 소련군이 돈화에 들어오자 소련군 사령부의 변역 겸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소련군의 치안 유지를 돕는 한편, 9월 20일 민주해방동맹과 무장자위대를 조직, 친일파 숙청과 조선인 보호를 위해 힘썼다.

1945년 10월 중국공산당 돈화현 위원회 책임자인 류건평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6년 3월 돈화현 인민정부 부현장, 돈화현 민주대동맹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연변일보의 전신인 길림일보사의 책임주필, 1948년 3월 연변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49년 연변대학 설립에 참가, 전임 부총장이 되었다. 그 해 10월부터 1955년 11월까지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건립되자 정치협상회의 주석이 되었다.

1966년 10월 문화대혁명 때 주자파(走資派) 밀정으로 지목되어 박해를 받다 1970년 7월 14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2년 사인방(四人幇) 몰락 후 1978년 7월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중국조선족인물전』(한중광 주필, 연변인민출판사, 1990)
『중국민족발자취총서』제5권(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연변인민출판사, 1989)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제3권(김준엽·김창순, 198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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