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해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중국공산주의청년단 화검구 서기, 중국공산당 서대림자치부 서기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오기섭, 오영일, 김도훈, 오동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3월 5일
사망 연도
1972년 7월 3일
출생지
러시아 연해주 동쌍성자(東雙城子)
정의
일제강점기 중국공산주의청년단 화검구 서기, 중국공산당 서대림자치부 서기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본명은 오기섭(吳基涉). 일명 오영일(吳永一)·김도훈(金道訓)·오동원(吳東元).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길림성 부성장, 연변조선족자치구(延邊朝鮮族自治區) 주석(主席) 등을 역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3월 5일 러시아 연해주 동쌍성자(東雙城子) 도별하촌(道別河村)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920년 3월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지신향(智新鄕) 승지촌(勝地村)으로 이주하였다. 그 해 공립 제14소학교에 입학해 1923년 겨울 졸업했다. 1927년 봄 소학교 교장이자 조선공산당 당원인 김근(金根)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이의 전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3월 김근의 가족과 함께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 화검구(花瞼構)로 이주했으며, 40여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4개의 집단농장을 건립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반신민부(反新民府) 시위를 주도하였다. 8월 김광희의 소개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화검구 서기가 되었다. 10월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즈음한 반일봉기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영안현 남호두(南湖頭)로 이동했다.

1931년 5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32넌 1월 동경성(東京城) 우가둔(子家屯) 공청단 특별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3년 3월 자목합자 당지부의 서기가 되어 친일기관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반대투쟁을 조직했으며, 8월 중국공산당 서대림자(西大林子)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1사에 입대했으나, 병에 걸려 발리현(勃利縣), 의란현(依蘭縣) 등지에서 요양하였다.

1937년 4월 당의 지시에 따라 모스코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1938년 여름에 졸업하였다. 이후 1939년 9월 연안(延安)으로 가 연안 경비구(팔로군) 제359여단 제8연대 특무중대 지도원, 제8연대 공급처 지도원으로 활동했으며,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 동간대(東干隊)와 중앙해외연구반에서 학습하였다.

1943년 연안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건립에 참여해 교무위원과 총무처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에는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만주로 진출해 심양(瀋陽)에 도착,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건립하고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7년 동북행정위원회 건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4월 민족사무처장이 되어 『민주일보(民主日報)』를 창간하고, 문공대(文工隊)를 조직하는 등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1949년 3월 중공 연변지구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6월 북경에 가서 조선족을 대표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협상하는 전국정치협상회 준비회의에 참석했으며, 9월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 4월 5일 길림성 제1차 인민대표회의에 출석, 성인민정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9월에는 연변지구의 방공사업 강화를 위해 조직된 연변방공위원회의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 자치주정부주석이 되었으며, 그 후 중공 연변자치구위원회 제1서기 겸 주장에 선임되었고, 연변대학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길림성 부성장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12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기 민족위원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는 박해를 받아 1969년 10월 호북성(胡北省) 53농장으로 전출되었으며, 1972년 7월 3일 호북성에서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후 복권되어, 연변자치주 위원회에서는 1978년 6월 20일 정식으로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참고문헌

『연변당사 인물과 사건』(김동화 외, 연변인민출판사, 1988)
『中共黨人物傳』第17卷(全國中國共産黨史人物硏究會 編, 陝西人民出版社, 1984)
집필자
황민호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