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성화보』는 1476년(성종 7)에 간행된 안동권씨의 족보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목판본으로 소장되어 있으며, 권씨의 내외손이 되는 권제, 권람, 서거정 등이 편집한 것을 경상도관찰사 윤호가 안동에서 간행하였다. 계보도에서 외손을 무제한 수록하고 자녀를 출생순으로 기재하며 여성의 재혼을 기록하는 등 조선 후기 족보와는 크게 다른 편집 방식을 채택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 중앙 관료층의 혈연 및 혼인 네트워크를 잘 보여 주고 있어서, 15세기 『문화유씨가정보』와 함께 후대 족보의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자료로 평가된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목판본 3권 3책이 소장되어 있다. 근래까지 1929년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중간(重刊)한 판본만 통용되다가, 1980년에 경상북도 안동시 도촌리 소재 도계서원(道溪書院)의 만대헌(晩對軒)에서 소장하고 있던 초간본이 서울대학교에 기증되면서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문에서는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 계보 첫 면에는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나, ‘성화(成化) 12년’이라고 하는 간행 당시의 중국 연호(年號)에 따라 ‘성화보(成化譜)’라고 통칭한다.
이 책의 계보 편집 방식과 이에 담긴 혈연에 대한 관념은 조선 후기 족보와 큰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 족보는 기본적으로 동성(同姓) 인물만을 모은 계보이지만, 이 책은 남계(男系)에 한정하지 않고 아들이 아닌 딸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외손을 무제한 수록하였다. 그래서 족보에 실린 9천여 명 가운데 95%는 비부계적(非父系的)인 다양한 계보로 이어지는 이성(異姓) 인물이다. 이 책의 편집과 간행에 참여한 서거정 등도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을 기점으로 여러 성씨가 섞여 있는 다양한 계보로 연결된 외손들이다. 때로는 이성의 계보를 경유해서 다시 권씨의 계보로 이어지기도 하고, 한 인물이 권씨의 시조와 연결되는 계보의 경로가 두 가지 이상인 경우도 있어서, 같은 인물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실린 예도 적지 않다.
자녀의 기재 순위도 남성을 여성보다 먼저 기재하는 ‘선남후녀(先男後女)’ 방식이 아니라 남녀 구분 없이 출생 순서를 따르고 있다. 또한 성리학적 친족 윤리에서 금기시된 여성의 재가(再嫁)도 그대로 기재하였는데, ‘전부(前夫)’, ‘후부(後夫)’ 등의 표기를 넣어 복수의 남편과 성씨가 다른 각각의 소생을 사실대로 기재하였다. 이러한 계보 편집 관행은 1565년(명종 20)의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재산 상속에서의 균분(均分) 원칙, 제사의 윤회봉사(輪回奉祀) 등의 친족 제도에서 남녀를 크게 구별하지 않던 당시의 친족 관습이 족보에도 반영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전기 중앙 관료층의 가계를 망라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서거정은 서문에서 “지금 의관잠리(衣冠簪履 : 관료)로서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드러난 자의 수가 천(千)을 헤아리는데, 모두 두 대족(大族 : 이 책에 수록된 안동권씨의 두 계파로서 후대에 추밀공파와 복야공파를 형성)의 지파(支派)”라고 하였는데, 당시 지배층이 동일 계층 내에서 연혼(連婚)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안동권씨의 내외손(內外孫) 범위에 대부분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당시 과거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음이 통계적으로 확인되는데, 이 책과 『문화유씨가정보』에서 확인되는 문과 급제자 2천여 명은 같은 시기 문과 급제자 총수의 60%가 넘는다고 한다.
한편 후삼국시대 인물인 시조에서부터 몇 세대는 안동의 향리(鄕吏) 가계로 이어지고 있어서, 고려시대 지방 세력이 문벌 가계로 전개되는 사례로서도 주목된다. 고려 초기 계보의 상당 부분은 각 세대에 한 명의 인물밖에 없는 단선(單線)으로 이어지다가, 고려 후기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권수평(權守平: ?1250)의 세대를 전후하여 복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족보의 편집을 위해 참고한 계보 자료의 수록 범위에 따른 한계로서, 서거정은 서문에서 문정공(文正公) 권보(權溥: 12621346)와 문탄공(文坦公) 권한공(權漢功: ?~1349) 이하는 상세하고 윗대는 소략한 까닭은 ‘알 수 있는 것은 기록하고 알 수 없는 것은 빠진 채로 둔 결과’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은 상기한 안동권씨의 두 대표 인물을 기점으로 정리한 가승(家乘)이나 내외팔촌지보(內外八寸之譜) 등의 소규모 가계 기록을 참조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17세기 이후 안동권씨 후속 족보들과 비교해 보면, 지방 사족이나 향리층을 포함한 다수의 계파가 누락되어 있다. 현재 통용되는 안동권씨의 15개 파 중에서 추밀공파(樞密公派), 복야공파(僕射公派), 별장공파(別將公派)의 3개 파만이 수록된 것이다. 아직까지 족보 문화가 사회 저변으로 널리 확산되지 못한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성씨와 본관을 같이 하는 종족(宗族) 단위의 계보를 망라한 최초의 간행본 족보로 인정받고 있다. 후대 족보에는 이보다 앞선 연대의 구보(舊譜) 서문이 실려 있기도 하지만, 족보 실물이 존재하지 않아 족보의 체재를 갖추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1401년(태종 1)의 『해주오씨족도(海州吳氏族圖)』처럼 가계 기록의 실물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나, 낱장의 장지(壯紙)에 계보를 특정한 형식 없이 도식화한 것으로 족보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성씨별 족보가 17세기 이후로 초간보(初刊譜)를 낸 점을 감안하면 선구적인 수보(修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권씨가 아닌 여러 성씨의 계보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한 세기 후에 간행된 『문화유씨가정보』와 함께 다른 성씨의 족보 편찬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여러 성씨가 혼재한 내외손(內外孫)의 통합 족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족보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는 중앙 관료층의 혈연 및 혼인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폭넓게 담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