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시집』은 1929년 4월 김억이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황포의 첫봄」 · 「늙은이의 말」 · 「무심」 · 「젊은 한때」 등 이른바 격조시 형식의 작품 122편의 시를 수록하여 발표한 시집이다. 이 시들은 김억이 주창한 시가(詩歌) 개량론의 실천으로서 향토적 정서의 정형시가 주조를 이룬다. 『안서시집』 이후 김억은 세 권의 창작 시집을 더 발표하지만 이 시집에서 보인 문학적 성취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또 『안서시집』은 이후 김억이 한시 번역과 유행 가요 가사 창작으로 나아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김억(1895~미상)은 일제강점기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등을 저술한 번역가이자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시인으로서 김억은 『해파리의 노래』 등 모두 여섯 권의 창작 시집을 발표했다. 『안서시집』은 김억의 네 번째 창작 시집이다. 김억은 1916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부터 사제의 인연을 이어간 김소월이 『안서시집』에 “백사장(白沙場) 넓은벌에/님왔다 간줄/어느 누구 알는가”라는 발문(跋文) 격의 시구를 써 주었다.
『안서시집』의 크기는 A6판이고 면수는 200면이다. 『안서시집』에는 김억이 쓴 「권두소언(卷頭小言)」이라는 서문이 실려 있다. 서문에서 김억은 『안서시집』에 수록한 시들을 ‘격조시(格調詩)’라고 명명하고, 이 시집이야말로 자신의 회심작이라고 밝혔다. 또 번역시는 번역자를 통해 새롭게 주조된 시라고 주장했다.
이후 제1부 ‘옛마을 황포(黃浦)’에는 「황포의 첫봄」 외 19편, 제2부 ‘오가는 흰 돗’에는 「늙은이의 말」 외 13편, 제3부 ‘예도는 구름’에는 「원산(元山)서」 외 9편, 제4부 ‘살구꼿’에는 「무심(無心)」 외 11편, 제5부 ‘시(詩)와 술과’에는 「아낙네」 외 4편, 제6부 ‘보람업는 희망(希望)의’에는 「발자옥」외 17편, 제7부 ‘하로에도 맘은’에는 「먼 후일(后日)」 외 27편, 제8부 ‘잔향(殘香)’에는 「젊은 한때」 외 14편 등, 모두 8개 장에 12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제8부 ‘잔향’의 시들은 한시(漢詩)와 서구시(西歐詩)의 번역인데, 원작의 제목과 작가를 밝히지 않았다.
『안서시집』은 시인 김억의 이력에서 절정기에 해당하는 시집으로, 그가 「밟아질 조선 시단의 길」(1927)에서 주창한 조선의 고유어 · 향토성 · 민요와 시조를 절충한 새로운 시형의 시 창작을 핵심으로 하는 시가 개량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성과이다. 따라서 『안서시집』의 경향은 김억이 1920년을 전후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비롯한 해외 시의 번역에 주력하면서 쓴 첫 번째 창작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의 경향과 사뭇 다르다. 김억의 1920년대 초의 시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띠었던데 것에 비해 1920년대 중반 시가 개량론의 주창 이후 『안서시집』의 정서는 밝고 경쾌하다.
『안서시집』의 시 대부분은 김억의 고향인 평안북도 곽산과 서도(西道)의 향토성, 인정 세태를 제재로 한다. 또 시 대부분이 김억이 「권두소언」에서 언급하고 후일 「격조시형론소고(格調詩形論小考)」(1930)에서 제시한 7 · 5조 4행의 정형시 형식인 격조시에 해당한다. 이것은 『안서시집』 이후 김억의 시, 유행 가요 등 운문 창작과 번역의 기본 형식이 된다. 예컨대 대표작 중 하나인 제4부에 수록된 「무심」은 1934년 3월 유행 가요로 음반에 취입되어 발표되기도 했다.
또 『안서시집』에는 김억의 시 번역이 창작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다. 예컨대 제2부의 「늙은이의 말」은 일찍이 『오뇌의 무도』에 실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늙은이」의 제재 · 주제 · 형식의 면에서 매우 닮은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제8장 「잔향」의 「젊은 한때」는 중국 당나라 여성 시인 두추랑(杜秋娘)의 「금루의(金縷衣)」를 옮긴 것이다. 일찍이 김억은 창작 시집 『봄의 노래』에서 이백(李白)의 「자야오가(子夜吳歌)」 등 여섯 편의 한시를 옮길 때만 해도 원제와 작가의 이름을 밝혔었다. 그런데 『안서시집』에 이르러서는 원제와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김억은 『봄의 노래』에서 자신의 한시 번역을 역안(譯案), 즉 번안이라고 했으므로, 『안서시집』에 이르러서는 번안과 창작의 경계를 지운 셈이다.
그런가 하면 『안서시집』에는 김억과 제자 김소월 간의 각별한 관계를 반영하는 시도 실려 있다. 제7부의 「먼 후일」은 김소월의 같은 제목의 시에 대한 화답(和答)이다.
김억은 이후 『안서시초』(1941), 『먼동 틀 제』(1947), 『안서 민요시집』(1948) 등 모두 세 권의 창작 시집을 더 발표한다. 이 중 『안서시초』와 『안서 민요시집』은 작품성의 면에서는 『안서시집』보다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안서시집』이야말로 시인으로서 절정기의 재능이 집약되어 있다. 한편 『안서시집』은 1920년대까지 김억의 문학적 이력을 반영하는 한편 1930년대 김억의 변모를 예고한다. 그중 하나는 「무심」 등의 유행 가요 가사 창작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 시집 『망우초(忘憂草)』(1934) 이후 한시 번역이다. 이 모두 김억이 주창한 시가 개량론의 구체적인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