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御眞) 제작에 앞서 어용화사의 선발은 우선 대신들이 당대 화가들 중 초상화를 잘 그리는 자들을 천거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자를 선정하게 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재(試才)를 거쳐 최후 결정을 보기도 하였다. 어진도사(御眞圖寫) 및 모사(模寫)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도화서(圖畵署) 소속 화원(畵員) 중 초상화로 이름난 화가들이 담당하였다. 하지만 1713년(숙종 39)과 1748년(영조 24), 혹은 1900년의 경우처럼 때로는 방외화사(方外畵師)를 천거하여 시재에 참여하도록 하기도 했다.
시재의 방법으로는 1713년 숙종어진도사 때처럼 그 당시 그림 솜씨로 이름을 떨치던 자들을 대신들이 추천한 뒤 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각기 초본(草本)을 그리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 일시에 많은 화사들이 입시(入侍)하게 되면 혼잡하므로 도감(都監)이 먼저 그 재능을 시험하여 특장(特長)한 자를 택하여 어전(御前)에 입시하여 초본을 그리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을 시재한 결과 그다지 우열이 없으면 2인을 모두 입시하도록 하여 각기 초본을 그리게 하여 마지막 결정을 하는 방법도 있었다. 1735년(영조 11) 세조어진모사 때나 1872년(고종 9) 고종어진도사 때는 대신들이 후보를 천거하고 이들에게 훈신상(勳臣像)이나 기로도상첩(耆老圖像帖)을 초본에서 설채(設彩)까지 완전히 마치도록 하여 그 중 가장 뛰어난 전신(傳神)을 이루어낸 화사를 뽑았다.
선발된 어용화사들은 3부류로 나누었다. 첫째가 집필화사 즉, 주관화사(主管畵師)로서 용안을 담당하였다. 둘째 부류는 동참화원(同參畵員)으로 시재 결과가 버금갔던 자로서 용체(龍體)의 주요하지 않은 부위를 담당하였다. 셋째는 수종화원(隨從畵員)이라 하여 화채(和彩) 시 일을 도왔다. 참여 화원의 수는 대략 6인 정도였으나, 그 수효는 융통성이 커서 때에 따라 13인에 이르기도 하였다.
기록상에 보이는 어용화사들의 명단을 보면 모두 당대에 명망 있는 제1급의 화사였다. 또 인물화는 물론 산수화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드러낸 인물들이다. 어진 제작이 끝나 진전(眞殿)에 봉안된 뒤 이들에게 주어진 논상(論賞)을 보면, 대체로 주관화사는 가자(加資)되고, 동참화사에게는 모두 동반정직(東班正職)이 제수되고, 수종화사에게는 아마(兒馬) 1필이나 혹은 활 1장이 사급되었다. 이와 같은 직위의 승진이나 물질적 혜택 이상으로 어용화사(御用畵師)라는 칭호에 부수된 명예는 일생을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