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 ()

안견의 사시팔경도 중 초하
안견의 사시팔경도 중 초하
회화
개념
산과 강 등의 자연경관을 소재로 그린 동양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산수화는 산과 강 등의 자연경관을 소재로 그린 동양화이다. 자연을 무생명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 생동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동양 특유의 자연관이 반영되어 산수화도 기운생동해야 한다는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유행한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여 우리 고유의 산수화 양식을 창조해 왔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백제·신라의 공예품에서 산수 표현의 양상이 확인되며, 고려시대에는 산수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산수화가 크게 발달하여 작품들이 상당수 전해지는데, 후기에는 진경산수화와 남종화가 유행하였다.

정의
산과 강 등의 자연경관을 소재로 그린 동양화.
개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의 산수화는 자연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자연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따라서 산수화란 이 두 가지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농경을 주로 하였던 우리나라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매우 소중하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또한 무생명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처럼 살아서 생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자연을 표현한 산수화는 기운생동(氣韻生動)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고 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 때문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산수화가 그려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산수화는 중국 한대(漢代)에 산악을 선인(仙人)과 진수(珍獸)가 사는 영적 세계로 보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유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도안적이며 상징적인 형태로 인물화의 배경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종병(宗炳)에 의해 와유사상(臥遊思想)이 제시되는 등 산수화의 이념이 형성되면서 점차 순수한 감상을 위한 그림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당대(唐代)를 거쳐 10세기의 오대(五代)와 북송(北宋) 초에 이르러 회화사의 주류로서 대종을 이루며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산수화

우리나라에서 먹이나 채색을 써서 붓으로 그리는 넓은 의미에서의 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다른 회화 분야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회화다운 그림이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중에서도 그 중엽에 해당되는 4세기경의 고구려에서라고 여겨진다.

회화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산악이나 수목을 표현한 넓은 의미에서의 산수화는 인물 등의 다른 분야에 비하여 좀 늦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5세기 초경 벌써 수렵의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영락(永樂) 18년”, 즉 408년에 조성되었다는 연기(年記)가 있는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의 수렵도에는 사냥하는 기마인물과 함께 마치 넓은 판자를 굴곡 있게 오려서 세워 놓은 듯한 산악, 반원의 초록색 버섯을 연상시키는 수목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산수화적 요소의 묘사가 그 뒤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에서는 아직도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동적이고 비교적 사실성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에 중국 남북조시대 회화의 영향에 자극을 받으면서 좀 더 율동적이고 사실성이 강한 경향으로 변화했다. 강서대묘(江西大墓)내리(內里) 1호분, 진파리(眞坡里) 1호분에 보이는 삼산형(三山型) 산악 형태와 거기에 구현된 산과 산 사이의 공간, 그리고 산다운 분위기와 나무다운 나무의 표현 등이 잘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의 산수화는 대체로 초기부터 중기를 거쳐 후기로 넘어가면서 점차 발전해 갔다.

백제의 산수화

삼국 중에서 고구려에 이어 백제가 산수화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백제의 산수화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파악이 불가능하다. 백제의 산수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가 부여의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이다. 대체로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산수문전의 문양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산수화적 요소들보다 오히려 발달된 것으로 균형 잡힌 구도라든가 공간감과 깊이감의 표현, 산다운 분위기의 묘사 등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발견된 은제탁잔(銀製托盞)에 산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백제에서는 이미 6세기 초 금속 공예품에 하나의 문양으로 등장할 정도로 산수화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신라의 산수화

삼국 중에서도 신라는 자료가 가장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1985년에 발견된 기미년명(己未年銘) 순흥(順興) 읍내리 고분벽화에 산악 그림들이 나타나 있다. 그 표현은 고식(古式)에 속하는 고구려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영향을 토대로 신라적인 화풍이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塼)에 나타난 누각(樓閣) 산수 문양과 같은 공예품의 형식적인 도안을 통하여 당시 산수화적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솔거(率居)의 「노송도(老松圖)」에 대한 일화에서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가 유행하였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고려의 산수화

고려시대는 이전 시대와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산수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이 시대의 산수화는 북송(北宋), 남송(南宋), 금(金), 원(元), 명(明) 등 중국 역대 왕조와의 회화교섭을 통해 많은 자극을 받고 자체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체로 고려의 전반기에는 북송의 영향을 수용하였고, 후반기에는 원대 회화로부터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전반기 산수화의 양상을 밝혀 주는 작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과 일본의 난젠지(南禪寺)에 소장되어 있는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의 목판화들이 고려 전기 산수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다. 그 중 성암고서박물관의 『어제비장전』 권6 제2도를 살펴보면, 고려 전기의 산수화가 북송의 이곽파(각주가 이곳으로 이동)와 많은 연관성이 있었음은 물론 그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고원(高遠) · 평원(平遠) · 심원(深遠)이 고루 갖추어져 있고, 여러 가지 모양의 산과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표현되어 있어 고도로 발달된 산수화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여기에 표현된 산수는 비록 판화이기는 하지만, 초보적인 단계에 있던 상징적 표현체로서의 삼국시대 산수화와는 달리 매우 사실적이며 서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12세기 전반에 이미 한국적인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가 발전하고 있었다. 인종연간(재위 1122∼1146)의 유명한 화원 이녕(李寧)「예성강도(禮成江圖)」「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 등을 그렸던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금강산도」, 「진양산수도(晉陽山水圖)」,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 등이 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에 한국적인 실경산수화가 발달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실경산수화들은 기록에만 보일 뿐 실제로 전해지는 작품이 없어 양식적인 특징을 밝힐 수는 없다. 고려시대에 어떠한 산수화풍들이 유행하였는지에 관해서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중국과의 문화교섭이나 단편적인 기록 및 노영(魯英)이 그린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등을 비롯한 극소수의 작품들에 의거해 볼 때, 대략 이곽파(李郭派 : 곽희파) 화풍과 미법산수(米法山水) 화풍, 그리고 원대의 원체화풍(院體畵風) 등이 전래되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남송의 원체화풍도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의 산수화

조선시대에는 산수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전하는 작품도 많은 편이다. 그 흐름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1392∼약 1550)

고려시대로부터의 전통을 계승하고 명나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면서 이 시대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발전시켰다. 이 시대 산수화 양식의 형성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던 화풍으로는 이미 고려시대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이곽파 화풍, 남송 원체화풍, 미법산수 화풍 그리고 명나라 초기의 원체화풍과 절파 화풍(浙派畵風) 등을 들 수 있다.

이곽파 화풍은 조선 초기의 거장인 안견(安堅)이 수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시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그의 전칭작품(傳稱作品)인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작품들은 이곽파 화풍을 토대로 발전된 한국 산수화의 특색을 강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특색은 안견과 그의 후계자들이 남겨 놓은 이른바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의 구도 및 공간 개념, 필묵법, 준법(皴法) 등에서 뚜렷이 간취된다. 안견파 화가들은 산을 웅장하게 표현하고, 인물이나 동물을 매우 작게 묘사하는 경향을 띠었다. 또한 그들은 몇 개의 흩어진 경물(景物)들을 조합하듯 구성하고, 조광 효과(照光效果) 등 자연의 분위기 묘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붓을 잇대어 써서 개별화된 필획의 노출을 피하는 경향도 보였다.

15세기 최고의 화원이었던 안견이 이룩한 화풍과는 현저하게 다른 경향의 산수화풍이 같은 시대의 문인화가인 강희안(姜希顔)에 의해 보다 소극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나 그 밖의 전칭 작품들로 미루어 보면, 강희안은 명대 저장성(浙江省)을 중심으로 대진(戴進) 등에 의해 형성된 절파 화풍이나 원체화풍의 그림들을 즐겨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사관수도」에서는 인물 표현에 역점을 두고 산수는 그 배경으로만 간략하게 다루어 안견 일파의 화풍과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밖에 조선 초기 남송대의 마하파(馬夏派) 화풍도 어느 정도 수용되었던 듯하다. 한 예로 이상좌(李上佐)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를 들 수 있다. 이상좌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왼편 아래쪽 구석에 무게가 치우쳐 있는 일각구도(一角構圖)나 산허리에서 돋아나 꾸불꾸불 직각을 이루며 하늘로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모습은 물론 눈썹 같은 원산(遠山)과 근경의 인물들까지 마원화풍(馬遠畵風)의 수용을 잘 보여 준다.

위에서 살펴본 화풍들 외에도 조선 초기의 산수화단에서는 미법산수 화풍이 자리를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나라(奈良)의 야마토분카관(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는 서문보(徐文寶),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 등 15세기 말의 화가들이 그린 산수화들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미점(米點)과 태점(苔點)들로 묘사된 산의 모습, 화면에 충일하는 안개 낀 자연의 분위기, 그리고 수지법(樹枝法) 등은 이들 작품이 미법산수 화풍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미법산수 중에서도 미불(米芾)의 화풍과 동원(董源)의 화풍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던 원대 초기의 문인화가 고극공(高克恭)의 화풍과 특히 관련이 깊다.

이러한 작품들의 존재는 비교적 단순하였으리라고 흔히 생각되던 조선 초기의 산수화가 상당히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다양성은 일본에 건너가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회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이수문(李秀文)과 문청(文淸)의 산수화 작품들과 그 밖에 일본에 남아 있는 여러 작품들에 의해서도 입증이 된다.

중기(약 1550∼약 1700)

이 시대의 산수화는 조선 초기에 형성된 화풍의 전통을 계승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초기의 안견파 화풍과 남송 원체화풍이 계속되면서 절파 화풍이 크게 유행되었던 점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초기에 형성된 이러한 화풍들을 계승하면서 이 시대 나름의 특색들을 발전시켰던 점과 더불어 명대의 미법산수 화풍을 포함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수용하기 시작한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화가들이 안견파 화풍 · 남송 원체화풍 · 절파 화풍 · 남종화풍의 어느 한 가지만을 따르기보다는 두 가지 정도의 다른 화풍들을 따로따로 구사하거나 절충하여 그리는 경향을 강하게 지녔음도 괄목할 만하다.

먼저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대표적인 예로는 김시(金禔)「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 이정근(李正根)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이흥효(李興孝)의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 이징(李澄)「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안견파 화풍의 전통을 계승하였던 화가와 작품들은 적지 않다.

조선 중기의 산수화에서 제일 널리 유행하였던 것은 절파 화풍이다. 이 화풍은 조선 초기에 이미 전래되어 조선 중기에 이르러 크게 풍미하였다. 이 화풍의 특징은 김시, 이경윤(李慶胤), 김명국(金明國) 등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흥효와 이정(李楨)의 작품에서는 이 시대 화가들의 외래화풍의 수용 태도를 엿볼 수 있어 주목된다. 조선 중기의 절파 화풍은 17세기에 이르러 김명국에 의해 더욱 강렬하고 거칠게 변하였다. 즉 김명국은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에서 보듯이 절파 화풍 중에서도 광태사학적(狂態邪學的)인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이러한 화풍 외에도 조선 중기에는 원체화풍에 의한 그림이 일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남종화가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초에 명대 오파(吳派)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던 문징명(文徵明)의 서화와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가 전해져 『선조실록』허목(許穆)이나 김상헌(金尙憲) 등의 문집에 언급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남종화가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하였던 사실은 이 밖에 이정근의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이경윤의 동생인 이영윤(李英胤)의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 이정의 『산수화첩(山水畵帖)』 등에 의해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후기(약 1700∼약 1850)

전대에 유행하였던 절파 화풍을 위시한 전통적 화풍들이 눈에 띄게 쇠퇴하였다. 그 대신 남종화풍과 그것을 토대로 발전된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이 풍미하였다. 남종화는 이미 조선 중기에 수용되기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종래에 전래되었던 원대와 명대의 남종화 외에 청대의 남종화가 유입되어 이 시대 남종산수화의 폭을 넓혀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산수화의 의의를 깊게 한 것은 진경산수화의 발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정선(鄭敾)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치를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사하여 그림으로써 한국풍의 산수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정선의 작품은 연기(年記)가 있는 것이 매우 희소하다. 그나마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은 모두 노년기의 것이어서 그의 진경산수화가 언제 확립되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금강산을 위시한 아름다운 산천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렸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한국적인 산수화풍을 형성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조선 후기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김응환(金應煥), 김석신(金碩臣) 등 적지 않은 추종자를 배출하였다.

정선의 제자 심사정(沈師正)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진경산수화보다는 보다 전통적인 중국풍 남종화법의 그림을 즐겨 그렸다. 남종화풍은 조선 후기에 많은 문인화가와 화원들에 의해 구사되었다. 그 중에서도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강세황은 허필(許佖), 신위(申緯), 김홍도(金弘道) 등의 화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화원 중에도 산수화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김홍도와 이인문(李寅文)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김홍도는 산수화 방면에서도 정선에 이어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산수화의 또 다른 일면은 윤제홍(尹濟弘)정수영(鄭遂榮)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간결한 구도와 수채화적인 담채법(淡彩法), 그리고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매우 신선하고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기본적으로 남종화법에서 발전된 것이지만, 그 이색적인 화풍 특징은 그들 자신의 것이다. 윤제홍의 화풍은 조선 말기로 전해져 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는 남종화가 유행하였고, 그 화법을 토대로 이 시대 특유의 진경산수화가 발전하였으며 이색적인 경향의 산수화가 태동되었던 것이다.

말기(1850∼1910)

대개 몇 가지의 다른 화풍들이 공존하였던 앞의 시대와 달리 조선 말기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남종화 일변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물론 전대의 화풍들이 전혀 잔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 화풍의 주류는 역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높은 경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둔 남종화로 귀결된다. 이러한 경향 때문인지 조선 후기에 완성된 정선 일파의 한국적인 진경산수화는 이 시기에 이르러 민화(民畵)에 그 전통이 전해질 뿐,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주도적인 화가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다.

조선 말기의 산수화는 김정희(金正喜)의 감화를 받았던 조희룡(趙熙龍), 허련(許鍊), 전기(田琦) 등 이른바 김정희파의 작품들과 김수철의 이색화풍(異色畵風) 그리고 장승업(張承業)의 작품들에서 그 주된 경향과 특색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고도의 문기(文氣)와 사의(寫意)의 세계만을 회화의 미덕으로 여겼던 김정희의 영향이 화단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조선 말기의 산수화를 근대 및 현대 화단으로 전한 이 시대의 마지막 거장은 장승업이다. 그는 북종화(北宗畵)도 그렸지만 주로 당시 화단을 풍미하던 남종화를 수용하여 그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괴팍한 성격만큼이나 유별난 화풍을 창조하였다. 특히 과장되고 바로크적인 형태와 특이한 색조는 장승업 화풍의 큰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한국 근대화단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에게 전해졌다.

이처럼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남종화풍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들 나름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수준은 그 이전에 비하여 뒤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몇몇 화가들의 경우는 그렇지만도 않다. 또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했던 이 시대에 이 정도의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은 조선 후기에 뿌리를 내린 남종화를 계승, 발전시킨 점과 김정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수준 높은 문인정신이 영향을 미쳤던 것에 힘입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구도나 공간 개념, 각 경물들의 묘사법 등에서 중국의 화풍을 섭취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 특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특색은 시기를 달리하며 한국적 화풍의 형성과 전개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5세기경의 삼국시대에 인물화 등의 배경적 요소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던 우리나라 산수화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순수 감상화로서 크게 성장하면서, 우리 산천을 소재로 하는 실경 산수의 전통을 형성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성행하였던 조선시대를 통하여 산수화는 회화 사조의 대종을 이루면서 한국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산수화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1910년의 국권 상실에서 1945년 광복까지 민족 치욕의 시기에도 뿌리 깊은 전통회화는 조선시대를 뒤이은 시대적 양상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산수화는 종래의 관념산수화의 구도와 화법에서 벗어나 개별 화가의 개성적 필법과 주변의 경관을 스케치한 현실적 시각의 사경산수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조선 말기에서 1910년대에 걸쳐 크게 활약한 안중식과 조석진은 당대의 대표적인 산수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앞 세대의 거장인 장승업의 영향과 감화를 반영한 필치와 창작성으로 전통적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동시에 안중식은 현실적 사실주의 정신과 서양화법으로 경복궁의 실경인 「백악춘효(白岳春曉)」(1915년)「영광풍경(靈光風景)」를 그려 보임으로써 후진들에게 근대적 산수화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안중식은 조석진과 더불어 한국 최초의 미술학교 성격이었던 1910년대의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중심적인 선생이 되어 1920년대 이후의 새로운 사실적 풍경화를 주도한 이용우(李用雨), 박승무(朴勝武),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같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이 새로운 세대는 공통적으로 종래의 산수화 형식을 배격하고 한국의 현실적 자연미와 향토적 풍정을 서로 다른 수법으로 주제 삼으면서 시대적 작풍과 창의적 화면을 성립시켰다. 그러한 궤도에서 이상범과 노수현은 특히 화단 진출을 같이 했던 변관식(卞寬植)과 더불어 1970년대까지 두드러진 제작 활동을 지속하여 근 · 현대 한국 산수화의 거봉(巨峯)을 이루었다. 그들은 다 같이 시골 정취와 한국의 산수 경관을 소재로 삼았으나 각자의 취향과 수법으로 개설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노년기 이후에는 모두 심상적인 구도와 성격적 감정을 표현한 많은 명작 혹은 역작을 남겼다.

한편 1920년대에 광주(光州)에 정착하여 활약한 허백련(許百鍊)은 19세기의 대표적 산수화가인 진도(珍島) 출신 허련(許鍊)의 방손(傍孫)으로 그 뒤를 이어 정통 남종화 정신을 계승한 산수화 창작으로 고매한 경지에 이르렀고 남도 산수화의 마지막 거봉이 되었다. 반면 허련의 직계손인 허건(許楗)은 목포(木浦)에 정착하여 전통적 산수화 필법과 향토적 사실주의 감각을 조화시킨 작품 활동으로 독자적 세계를 실현시켰다.

그와는 달리 영남 출신으로 허백련을 사사한 성재휴(成在烋)는 1950년대 이후 서울에서 개성적 기질의 자유로운 운필(運筆)로 사풍(師風)을 벗어난 독특한 산수 풍경화를 창조했다. 그에 앞서 더욱 특출하고 분방한 필력으로 새로운 표현 정신의 수묵화를 추구한 이응로(李應魯)도 1958년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많은 역작과 걸작의 풍경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상범을 사사한 배렴(裵濂)은 체험적인 자연 풍경을 부드러운 수묵담채의 필치로 충실하게 그려낸 서정적인 화가였다. 또 김은호(金殷鎬)에게 전통적 채색화 기법을 사사하고 일본의 미술학교에 유학한 이유태(李惟台)는 간결한 수묵 채색화법으로 주로 설악산을 주제로 한 산수화를 사실적 시각으로 그려내었다.

오늘날에는 ‘산수화’란 말 자체가 이미 전통 시대의 용어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근대 사경산수화를 거치며 점차 산과 물이 반드시 그려지기 않기 때문에 ‘풍경화’로 총칭하는 것이 오히려 전달이 쉽고 자연스럽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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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산수화의 발생 연구」(이태호, 『미술자료』38, 국립중앙박물관, 1987)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 연구」(이태호, 『한국미술사논문집』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한국산수화의 발달 연구」(안휘준, 『미술자료』26, 국립중앙박물관, 1980)
『山水』思想と美術(京都國立博物館, 1983)
『李朝の水墨畵』(松下隆章·崔淳雨, 講談社,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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