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서화가들이 근대적인 의식의 첫 미술가 단체로서 서화협회를 창립하자 16세의 최연소로 정회원이 되었다. 1920년 서화미술회 동기생인 오일영(吳一英)과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봉황도」를 합작하였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고성춘심(古城春深)」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23년 서화협회전람회(약칭 협전)에 「월야독서(月夜讀書)」와 「도원춘색(桃源春色)」을 출품하였다.
1923년 이상범(李象範) · 노수현(盧壽鉉) · 변관식(卞寬植)과 ‘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하고 전통 화법의 시대적 새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들의 공동 의지는 고정 관념의 전통 화법 답습 배격과 자유로운 회화 정신에 입각한 현실 시각의 존중이었다. 이에 따라 사생풍의 산야 또는 농가 풍경이 과거의 관념적 산수 화법을 멀리하고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합리적 사실주의의 서양화법과 일본화의 새로운 양상에서 자극된 것이기도 하였다.
1928년 선전에는 「제7작품」이라는 제목의 진취적인 내용과 형식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독자적인 묵법과 필법을 구사하면서 안정된 자기 양식을 구축하고 정적한 심산풍경(深山風景)을 다분히 환상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1940년을 전후해서는 한국의 농촌 풍경을 포함한 친근한 향토적 정경에 눈을 돌려 경쾌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또한 현대적인 감각과 신선감이 물씬 풍기는 특징적인 화조화도 많이 그렸다. 1940년 조선미술관에서 열린 ‘10명가산수풍경화전(十名家山水風景畵展)’에 참여하였다.
1942년 부민관 중앙강당에서 「군어도」, 「해송도」등 109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1944년 강릉으로 거처를 옮긴 뒤 강릉여고와 강릉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였다. 1946년과 1948년 개인전을 가졌으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52년 부산 피난 중 개인전을 준비하였으나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으로 「백두산천지(白頭山天池)」가 있다.
1982년 동아일보사에서 『묵로 이용우 회고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