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97㎝, 가로 579㎝. 「봉황도(鳳凰圖)」는 오일영과 이용우가 합작해서 그린 것으로, 창덕궁 대조전 내의 동벽 상단(상인방에 해당함)에 장식되었다. 마주보는 대조전 서벽은 김은호(金殷鎬)가 맡아서 「백학도(白鶴圖)」를 그렸다. 이들은 경훈각(景薰閣)의 장식을 맡은 노수현(盧壽鉉), 이상범(李象範)과 함께 모두 서화미술회를 졸업한 동문으로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문하에서 그림에 입문한 신진 화가들이었다.
창덕궁의 벽화 제작은 당초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총무였던 김응원(金應元)에게 의뢰하였으며, 강필주(姜弼周), 김은호, 고희동(高羲東),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가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 5명뿐이었다. 가장 큰 희정당 벽화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의 김규진(金圭鎭)이 홀로 동서벽을 모두 맡아서 그렸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이 벽화 제작을 위해 3,000원이 넘는 넉넉한 그림값을 주었는데 이것을 분배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하고 있다. 당시 몇 채의 집값에 해당하는 윤필료였던 만큼 욕심이 앞섰던 듯하다.
이 벽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은 김규진을 제외하면 모두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이용우는 20살이 아직 되지 않은 19살이었으므로 황실이 주도가 된 대규모 사업에 아직 작가적 완성기에 접어들지 않았던 화가들이 참여했던 사실은 주목된다. 그들의 스승이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의 사후에 중간 세대였던 이도영이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곧바로 20대의 젊은 신진 화가들에게 화단의 중심이 옮겨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화미술회의 스승이었던 김응원은 묵란도를 주로 그렸으므로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던 듯하며 강필주는 김응원과의 불화로 인해 참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김은호의 기록에 의하면 이 벽화가 579㎝의 적지 않은 크기의 대작이었지만 1920년 8월 초에 착수하여 9월 말에 모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규모의 희정당(熙政堂) 벽화 2폭을 모두 맡았던 김규진도 같은 시기에 완성했던 것을 보면 참여 화가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이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봉황도」가 그려진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이 있는 생활공간으로, 1917년 화재 후 재건할 때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와 지었다. 이때 대조전은 희정당과 경훈각과 서로 이어지도록 복도와 행각을 연결시켜 재건되었다. 이 세 건물에는 모두 6점의 벽화가 장식되었는데, 대조전의 「봉황도」, 「백학도」외에 희정당에는 김규진이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동벽)와 「금강산만물초승도(金剛山萬物肖勝圖)」(서벽)를, 경훈각(景薰閣)에는 노수현이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동벽)와 이상범이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서벽)를 각각 제작했다.
대조전 동쪽의 「봉황도」에는 화면의 약간 왼편에 해가 그려졌는데, 서쪽의 「백학도」에 그려진 달과 함께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동서쪽의 벽화를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면 마치 하나의 연폭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양의 이치를 보여줄 뿐 아니라 경물을 배치하고 채색을 하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두 작품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나머지 벽화도 마찬가지다. 즉 제작자들은 건물의 사용 용도와 소재의 선택, 제작 기법에까지 동서벽을 한 쌍으로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벽화는 당시 화단에서는 드물게 장대한 화면에 진채(眞彩)의 장식적인 구성과 기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