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작품 제목은 ‘백악의 봄 새벽’이라는 의미이며,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 상황에서 자주 독립에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원래 여름본은 이왕가(李王家) 요청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덕수궁미술관(창덕궁박물관의 후신)에 소장되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가을본 역시 총독부박물관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전하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주변 실경을 그린 여름본과 가을본은 달라진 계절과 경물의 위치가 약간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구도는 물론 표현기법까지 거의 유사하다.
여름본은 근경의 좌우에 우거진 녹음(綠陰) 사이로 해태상이 보이고, 중경에는 경복궁과 백악(白岳)이라 불리는 북악산(北岳山)이 위치하고 있다. 근경 및 중경에 보이는 구름과 굳게 닫힌 광화문은 새벽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암시해준다. 반면 가을본의 경우 오른쪽 해태상이 나무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경복궁과 북악산을 가까운 시점에서 약간 크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경복궁을 바라본 화가의 위치가 오른쪽으로 약간 이동하면서 시점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경의 북악산은 능선과 골짜기의 윤곽선을 따라 짧은 필선을 반복적으로 가하는 전통기법으로 표현하였는데, 동일한 양상을 같은 해에 그린 「영광풍경도」(삼성미술관 리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안중식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실경을 그리기도 하였지만, 전통시대의 관념산수 표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작품 속의 경복궁과 1915년 9월 3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시정(施政)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장소를 안내하며 실린 경복궁의 실제 모습이 상당히 달랐던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안중식이 경복궁을 그리면서 일본에 의해 훼손된 모습이 아니라 조선이 강건했던 시기의 궁궐로 표현한 것은 독립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의도로 보인다. 또한 비록 관념적인 전통화법이 혼재하지만, 조선 왕실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사생하여 근대적 화법으로 그려낸 것은 새로운 조형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화풍을 계승한 마지막 화가인 안중식이 근대적 미감의 구현에 있어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중요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