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이름이 확인되면서 ‘최연홍초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순조실록』12년(1812) 1월 10일조에 의하면, 평안도 가산(嘉山) 관기(官妓)였던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은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군수 정시(鄭蓍) 부자가 이희저(李禧著) 일당에 의해 살해되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상당한 시동생을 자신의 집에 숨겨 치료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녀의 의열(義烈)을 가상히 여겨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전답을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경민(李慶民)이 1866년 발간한 중인들의 전기집인 『희조일사(熙朝軼事)』에는 “운낭(雲娘)은 최연홍의 초명이며, 평안도 가산(嘉山)의 청기(廳妓)이다.”라고 쓰여 있다. 죽은 뒤에는 평양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 사당인 의열사(義烈祠)에 함께 제향되었다고 전한다.
화면에서 최연홍은 누런색 저고리에 푸른색 치마를 입고 벌거벗은 남자 아이를 안고 서 있는 독특한 전신입상(全身立像)을 취하고 있다. 저고리 동정이 일부만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미완의 상태이지만, 선묘에 의존했던 전통시대 초상화와 달리 색채로 면의 부드러운 질감을 나타낸 서양화법의 특징을 보여준다. 화면 오른쪽의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과 왼쪽 아래에 적혀 있는 “갑인발월석지사(甲寅渤月石芝寫)”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0년이 훨씬 지난 뒤에 채용신이 사건 당시인 최연홍의 27세 때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추화(追畵)임을 알려준다.
여성은 평상복 차림이지만 쪽을 진 단정한 머리와 짧은 저고리 사이로 가슴을 당당하게 드러낸 자태는 유교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여성상을 제시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녀의 의로운 행동을 기념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계도(啓導)하려는 감계적 목적을 지녔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인물화로 분류할 수 있다. 이밖에 주인공이 기녀라는 점에서는 신윤복의 「미인도」 계보를 잇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운낭자상’은 다양한 시각에서의 접근이 가능할 정도로 중의적(衆意的) 성격을 지닌 희귀한 여성상이라는 점에서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