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사앙(士盎), 호는 북산(北山).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화가로서, 김창수(金昌秀)와 형제 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가계(家系)는 미상이며, 조선 말기의 화단을 주도한 중인 문인 서화가들과의 교유 관계가 확인되어 그도 중인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철 · 허련 · 박인석 · 유숙 · 유재소 · 조중묵 · 전기 등 중인 화가들과 함께 회화 경연을 벌이고 김정희(金正喜)에게 평을 받은 내용이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1849년)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전기의 중개로 그림 주문을 받고 매매도 하였음을 알려 주는 서한(書翰)과 유재소의 『형당화의첩(蘅堂畵意帖)』에 쓴 김수철의 발문이 있어 교유의 범위를 알 수 있다. 중인 시사(詩社)인 벽오사(碧梧社)의 동인 조희룡 · 전기 · 유재소와 교유하였으나, 김수철이 벽오사 동인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수철(金秀哲)은 산수와 화훼를 잘 그렸으며, 간결한 필치와 대담한 생략, 참신한 조형 감각, 맑고 투명한 채색이 돋보이는 감각적인 회화 세계를 펼쳤다. 대략적이고도 속도감 있는 필치와는 대조적으로 유탄(柳炭)으로 밑그림을 그려 화면 구성을 한 후에 붓을 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구성과 배치에 대한 그의 신중함을 말해 준다. 산수화는 직선 위주의 짧은 윤곽선으로 대상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준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담채와 발묵(發墨) 기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솔이지법(率易之法)’이라는 평을 들었다. 예찬 · 황공망의 소산(蕭散)하고 간담(簡淡)한 화법을 이상으로 삼았던 당시의 회화관과 상통한다. 화훼화는 매화 · 국화 · 연화 등 군자(君子)의 아취를 나타내는 꽃 외에 맨드라미 · 작약 · 능소화 · 수국 · 등꽃 등 다양한 화종(花種)을 다루었는데, 평면적이고 간솔하면서 담백하여 일기(逸氣)를 풍기는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말기에 증진된 화조 · 화훼화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며, 이는 중국 명말 청초(明末淸初) 일필(逸筆)의 화훼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김수철은 사의적(寫意的) 남종화를 추구하면서도 새로이 대두된 여항의 서화 수요자 취향에 부응하여 근대적 감각과 장식성을 더한 이색적인 화풍을 선보인 선구적 화가였다. 대표작으로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간송미술관)와 「자양화도(紫陽花圖)」(일본 民藝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