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겸은 조선후기 「와운누계창」·「석천한유」·「안음송대」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호는 불염자·불염재이다. 조선 후기에 도화서 화원으로 궁중 행사에 동원되어 도화 업무를 담당했다. 산수화에서는 정선의 영향을 받아 ‘겸재의 본색’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산수화뿐만 아니라 화조화·영모화·풍속화·초상화도 잘 그렸다. 김희겸은 화원의 전통과 새로운 화풍을 두루 수용하여 폭넓은 역량을 과시한 화가였다. 작품으로 「와운누계창」(1756), 「안음송대」, 화첩으로 『불염재주인진적적첩』, 「석천한유」, 궁중 기록화로 『준천계첩』(1760) 등이 전한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익(仲益), 호는 불염자(不染子) · 불염재(不染齋). 조선 후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다. 대대로 여항 문인을 배출한 집안 출신으로 김희겸 또한 『풍요속선(風謠續選)』(1797년)에 「옥계유거(玉溪幽居)」라는 제목의 시를 수록한 문인이기도 하다.
옥계는 조선 후기 중인층의 거주지였으며, 여항 문인들의 시사(詩社)인 옥계사(玉溪社),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거점이기도 하였던 곳으로 그의 활동 반경을 알려 준다.
관직으로는 1748년 변장직(邊將職)에 제수되었고, 1753년 황해도 풍천부(豊川府) 초도(椒島)의 첨사, 1762년 사천현감을 지냈다. 품직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아들 김후신(金厚臣)도 도화서 화원이었다.
김희겸(金喜謙)은 도화서 화원으로 다수의 궁중 행사에 동원되어 도화(圖畫) 업무를 담당하였다. 1748년의 숙종 어진(영정) 모사도감(肅宗影幀摸寫都監)에 소속되어 동참 화사로 어진 제작에 임하였고, 1757년 정성왕후(영조의 비) 국장도감(貞聖王后國葬都監), 같은 해 인원왕후(숙종의 계비)의 국장도감(仁元王后國葬都監), 1759년 정조의 왕세손 책봉을 위한 책례도감[正祖王世孫冊禮都監]에 차출되어 도화 업무를 담당하였다. 1760년 『준천계첩(濬川契帖)』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김희겸은 정선(鄭歚)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그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다. 강세황과의 교유 관계도 확인되는데, 김희겸의 그림에 강세황이 제발을 쓴 예가 다수 전하고, 김희겸의 단명을 애도한 글도 전한다.
이 외에 김광국 · 김윤겸 · 김이곤 · 마성린 · 엄한붕 등 서화가나 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여항인과 안동 김문 출신의 서얼 문사들과의 교유하였던 것을 제발 · 화평 · 합작품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산수화 · 화조화 · 영모화 · 풍속화 · 초상화를 잘 그렸다. 산수화에서는 정선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눈에 띄는데 ‘겸재의 본색(謙齋本色)’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로 깊은 관련성을 드러내었다.
또한 강세황 · 심사정 계열의 산수화풍으로서 대상을 올려다보는 앙시(仰視)나 원경을 강조한 화면 구성, 암석의 표현에 준법 대신 음영과 설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방식도 구사하였고, 산주름에 음영을 가하여 입체감과 사실감을 살린 서양화풍의 산수화풍도 썼다.
인물화에도 능했는데 특히 「석천한유(石泉閒遊)」는 누각 위에 앉아 난간에 기댄 야복 차림의 무신(武臣) 전일상(田日祥)을 그린 초상화로서 당시로서는 혁신적 초상화 형식을 수용하였다.
김희겸은 화원의 전통과 당시로서는 새로운 화풍을 두루 수용하여 폭넓은 역량을 과시한 화가였다. 작품으로 「와운누계창(臥雲樓溪漲)」(1756), 「안음송대(安陰松臺)」, 화첩으로 『불염재주인진적첩(不染齋主人眞籍帖)』, 「석천한유(石泉閒遊)」, 궁중 기록화로 『준천계첩』(1760)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