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한문을 쓰면서도 말로는 국어를 꾸준히 지켜왔고, 글도 중간층인 아전들은 이두문(吏讀文)을 사용하여 왔다. 그러다 한글이 창제되자 여자층이나 서민층에 의하여 순언문(純諺文)이 쓰여지고, 중간층에 의해서는 이른바 언한문(諺漢文)이 쓰여졌다.
따라서, 종전의 2원제에서 언한문과 순언문이 늘어난 4원제로 되어 복잡해졌으나, 특히 서민이나 여자층이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이러다 갑오경장을 맞아 순국문(純國文)을 본으로 삼고 순한문(純漢文)과 국한문(國漢文)을 부로 하는 3원제가 공식화되었다. 또한, 1896년에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된 『독립신문』도 순국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한문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1908년에는 각의의 결정을 통하여 공문서를 오히려 국한문 하나로 통일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순국문체는 표기문자의 문제요, 실질적으로는 국한문체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즉, 이두문·순한문·순언문 혹은 순국문·국한문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거의 같다고 하겠다. 즉, 개화기의 국한문체라는 것은 한문에 토를 단 정도로서 언문일치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제1단계를 거쳐 제2단계인 1908∼1919년에는 질적인 개혁을 통하여 언문일치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광수(李光洙) 등의 여러 문필가의 관심과 부인이나 소년을 상대로 한 잡지의 문장 등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독립선언문만도 종래의 국한문이었지만, 3·1운동 이후 쏟아져나온 신문과 잡지나 간행물은 진정한 언문일치에 어느 정도 접근하였으므로, 이러한 1920년대를 일반적으로 언문일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언문일치는 원래 쓰는 글과 하는 말이 같다는 뜻이다. 일치한다는 그 뜻이 가령 ‘-므로, -고자 한다, -인즉, ……’과 같은 문어체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사용되는 것조차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어는 역사적으로 주변에서 밀려든 외래요소의 억압을 잘 포용하면서 끈질기게 자랐다. 그 중심에서 언제나 부단히 계승되어온 고유체계는 현대화된 오늘의 국어가 있게 된 바탕인데, 이는 우리 민족의 눈물겨운 투쟁적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