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술 동기와 역사, 서술 태도 등은 여사제강 범례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이미 간행된 『삼국사기』 · 『고려사』 · 『동사찬요(東史簒要)』 · 『동국통감』 등의 기사 내용과 체재, 그리고 사체(史體)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그 내용이 허황되고 터무니없어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려사』는 역대 전사(全史)의 체를 모방한 결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세가(世家) · 지(志) · 열전에 산재해 있어서, 비록 한 권의 책이지만 실제로는 세 권과 같아 내용파악이 곤란하다고 지적하였다. 게다가 그 권질(卷帙)이 아주 많아 절반도 보지 않아 곧 싫증이 난다고 하였다.
『동사찬요』는 기년체(紀年體)로 간략하게 찬집했으나, 따로 열전을 두어 실제로는 두 권과 같기 때문에 참고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하였다. 『동국통감』은 비록 한데 묶여져 있기는 하지만, 강(綱) · 목(目)의 구별과 편년(編年)의 차례가 없어서 읽는 사람이 그 강요(綱要)를 알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던 저자는 우리나라 사서에 이미 학문적 불만을 느껴 강목체로 간략한 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가 고려사만을 택한 것은 그 이전의 역사적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이성계(李成桂)가 창왕을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 요(定昌君瑤)를 옹립한 뒤 시중(侍中)이 되는 데에서 끝나고 있다. 이것은 고려왕조의 전체 역사를 다룬 사서로서는 불완전한 것이다.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성립 과정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빠진 이유는 저자의 확고한 역사적 안목과 판단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왜냐하면 『고려사』 등에 실려 있지 않은 새로운 사료는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나라 학자로서 우리 역사를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살리고자 한 노력은 주목된다. 그는 우리나라의 기년(紀年) 아래 중국의 연호를 달아놓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비록 해마다 중국의 정월 초하루를 받들고 있으나, 이 책은 곧 우리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에 종(宗)이라 칭하고 폐하 · 태후 · 태자 · 절일(節日) · 조(詔) · 제(制) 등의 명칭이 비록 참월하기는 하나, 당시 칭하던 바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는 융통성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