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후(子厚), 호는 야은(野隱). 아버지는 오두흥(吳斗興)이다.
1680년(숙종 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보직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춘천부사·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금군별장에 전임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호군직(護軍職)이 삭탈되고, 이듬해 남원에 유배되었다. 1725년 다시 복직되어 포도대장·금군별장(禁軍別將) 등에 기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안무사(嶺南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요청으로 통제사가 되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어 사퇴하였다.
그 뒤 한성부좌윤·동지중추부사·훈련원도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독서와 승마로 여생을 보냈다. 1733년 80세의 나이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급(加給: 일정한 액수 외에 더 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