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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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진성여왕 대의 문인.
이칭
이명
왕거인(王居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왕거인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진성여왕 대의 문인이다. 888년(진성여왕 2년)에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이 조정의 길목에 걸렸는데, 글쓴이로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던 왕거인이 거론되었다. 이에 진성여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왕거인이 원통해 하며 감옥의 벽에 글을 쓰자,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지니 진성여왕이 왕거인을 풀어주었다. 왕거인은 박인범·원걸·김운경·김수훈 등과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진성여왕 대의 문인.
인적 사항

왕거인은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대 시정을 비방하는 글을 썼다고 알려진 신라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이다. 왕거인(王居仁)이라고도 한다. 왕거인의 신분에 대해 그가 대야주에 은거한 점과 왕실 측근으로부터 국정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로 인식된 점에 근거하여 6두품으로 보기도 한다. 투옥되었던 왕거인이 풀려난 것은 소수의 측근 정치에 대한 불만을 가진 6두품 지식층들의 중론에 의한 압력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왕씨(王氏)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진골 출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요 활동

888년(진성여왕 2)에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이 조정의 길목에 걸렸는데, 글쓴이로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고 있던 왕거인이 거론되었다. 이에 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왕거인이 원통해 하며 감옥의 벽에 글을 쓰자,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지니 왕이 그를 풀어주었다.

이때 감옥의 벽에 쓴 글은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간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는데, 지금 나의 근심을 돌이켜보면 옛날과 비슷하건만 황천은 말이 없고, 단지 푸르기만 하구나〔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 삼국유사』에서는 그 정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였다. 시정을 비방하는 글을 짓게 된 연유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鳬好夫人)과 그의 남편으로 기록되어 있는 위홍(魏弘) 잡간(匝干)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며 정사를 어지럽혀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기 때문으로 서술되었다.

비방의 글은 다라니(陀羅尼) 은어(隠語)로 쓰였는데,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였다. 이를 해석하기를, '찰니나제(刹尼那帝)'는 여왕을 말하고, '판니판니 소판니(判尼判尼 蘇判尼)'는 두 소판을 말한 것이니, 소판은 관작(官爵)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 서너 명의 총신을 말한 것이며,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왕거인이 감옥의 벽에 쓴 글은 “연단(燕丹)의 슬픈 울음에 무지개가 하늘을 뚫고/ 추연(鄒衍)이 품은 슬픔 여름에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불우함이 그들과 같은데/ 황천은 어찌하여 아무 징조가 없는 것인가〔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라는 시(詩)라고 하였다. 이렇듯 두 자료 간 다소의 차이가 보이는 것은 전거 자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왕거인에 대한 기록은 『 삼국사기』에서 박인범(朴仁範), 원걸(元傑),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 등과 같이 글은 남아 있지만, 행적을 알 수 없으므로 전기를 쓰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함께 거론된 인물들은 신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이다.

한편, 왕거인이 시정에 대한 비판의 방편으로 다라니를 작성하여 배포하였고, 그 발신 장소가 진성여왕이 불교적으로 중시하던 공간인 대야주였다는 점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당대 왕실, 나아가 왕실과 결탁한 불교 세력에 대한 불만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대야주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진성여왕 당대에 왕거인의 다라니 투척 사건이 채록, 전승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이후 이 지역을 함락한 후백제(後百濟)의 입장에서 반신라적 기류들을 부각할 필요에서 왕거인 사건이 부각될 수 있었다. 이는 시국 비판의 수단이 다라니라는 점 역시 왕거인 설화의 채록 시기가 대야주에 대한 신라의 통치체제가 붕괴된 이후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신라에 다라니 신앙이 확산된 것은 9세기로, 이때에 이르러 대야주의 해인사(海印寺) 주변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왕거인의 다라니 투척 사건은 신라 말의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흐름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전기웅, 『신라의 멸망과 경문왕가』(혜안, 2010)

논문

신선혜, 「『삼국유사』 진성여대왕 거타지조 해석의 새로운 시각」(『불교연구』 51, 한국불교연구원, 2019)
여성구, 「삼국유사 곡도 거타지 설화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시론」(『한국학논총』 46,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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