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우묘(王旴墓)는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석암동에 있는 왕우의 무덤으로 알려진 낙랑군의 귀틀무덤이다. 일명 '대동석암리205호분'이라고도 한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사업으로 발굴이 실시되었다. 동혈합장 귀틀무덤으로 출토 유물은 토기류, 금공품류, 청동기류, 칠기류로 세분할 수 있다. 특히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 양면인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왕우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면, 1세기 중반에 조영되어 1세기 후반까지 세 번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낙랑 최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왕우묘는 평양직할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동강 남쪽 기슭에 축조된 낙랑 고분군의 하나인데, '대동석암리205호분'으로도 불린다. 왕우묘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출토 유물 중 왕우라는 묘주의 이름을 새긴 도장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16년에 발굴되어 초호화 유물이 출토되었던 석암리9호의 동남쪽 구릉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도쿄제국대학은 문학부 열품실과 도서관이 화마에 휩싸여 도서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총독부도 긴축 재정을 실시하면서 조선고적 조사사업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를 타개하고 열품실의 고고 자료를 새로 확보하기 위하여 도쿄제국대학 사학과의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는 호사카와 가문〔細川家〕 등의 후원을 받아 도쿄제국대학 사학회(史學會)의 사업으로 조선총독부에 발굴 조사를 신청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민간학술단체의 고분 발굴 조사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사업으로 발굴 조사를 허가해 주었다.
1925년에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는 석암리 일대에서 고분 3기를 선정하였다. 조사는 하라다 요시토〔原田淑人〕를 책임자로 하고 다자와 긴고〔田澤金五〕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조사원이 되었다. 조사를 기획한 구로이타 가쓰미도 수시로 현장 조사를 참관하였다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는 1925년 9월 29일에 시작되었다. 발굴 고분을 선정하고 30일에 굴착작업에 들어갔다. 다자와 긴고가 북분을 조사하고 고이즈미 아키오가 남분을 맡아 굴착 조사를 감행하였는데, 북분이 석암리205호이며 남분이 석암리204호이다.
남분의 경우 분구 외형을 먼저 측량하고 10월 1일부터 발굴 조사를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와 조각, 청동기 남은 조각, 칠기와토기 남은 조각 등이 출토되었지만, 10월 8일부터 북분인 석암리205호에서의 조사가 바빠지면서 남분의 조사는 중지되었다. 이후 추가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지표면이 결빙되어 중지되었다.
북분인 대동석암리205호분은 봉토를 제거하는 작업으로 조사를 시작하였다. 봉토의 중앙에 기준점을 설치하고 그 주위를 방사형으로 굴착하여 덧널의 범위를 확인하였다. 덧널의 천장부 외부에는 회청색 점토가 두껍게 발라져 있었는데, 이는 방수를 의도한 시설로 추정된다.
덧널의 내부는 진흙과 물로 가득 차 유구와 유물의 잔존 상태가 대단히 양호하였다. 조사는 11월 24일이 되어서야 측관의 조사를 실시하였다. 다음으로 관과 곽의 실측과 사진 촬영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후 나무널을 밖으로 반출해 내면서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조사 일수는 총 64일이었다.
대동석암리205호분은 동혈합장 귀틀묘로 주곽과 측곽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주곽은 남북을 2실로 나누었다. 덧널은 바닥 부분에 회청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각재(各材)를 나열하여 바닥으로 삼았다. 사방의 벽을 덧널벽으로 쌓아 올리고 동서벽 중간에 두 개의 들보를 세워서 지붕을 받치게 하였다. 그리고 두꺼운 목재를 가지런히 덮어서 천장 지붕으로 삼았다.
덧널의 서실과 북실, 그리고 측곽에는 바닥에 칠기 파편이 잔존하였다. 본래 껴묻거리 수납 공간으로 설계된 것을 이후 관을 수납하는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주곽 북실 서벽의 중앙에 별도의 창이 있는데 이는 껴묻거리가 안치된 측곽과 접한다.
보고서에서는 주곽과 측곽을 연결하기 위한 설계로 파악하였다. 덧널 내의 나무널은 주곽 주실에 3개가 안치되었고 따로 마련된 측곽에 1개가 안치된 형태이다. 관은 잣나무로 판명되었으며, 외면에는 옻칠이 된 상태였다.
발굴 결과 주곽과 측곽 상위의 북쪽 공간에서는 약 5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북실의 북장벽 중앙에는 구리거울과 와질제 항아리모양토기, 통모양칠기 등이 부장되었다. 그리고 동단벽에는 옻칠소반, 옻칠귀모양잔, 구리칼 등이 출토되었고, 서단벽에서는 옻칠귀모양잔, 옻칠그릇 등이 발견되었다. 주곽의 외곽에 따로 덧대어서 만든 측곽에는 구슬과 칠기류 들이 부장된 상태였다. 서관, 중관, 동관의 나무널 내부에서는 장신구류가 주로 부장되었다.
부장품을 종류별로 살펴보면 크게 토기류, 금공품류, 청동기류, 칠기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칠기가 전체 유물 중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우선 토기의 경우 화분모양토기 1점, 와질토기(瓦質土器) 짧은목항아리 6점, 백색토기항아리 3점이 출토되었다.
화분모양토기의 경우 활석혼입계(滑石混入系)에 속하는 것으로 굽이 달린 형태이다. 와질토기 짧은목항아리의 경우 모두 납작바닥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정선된 고운 점토로 성형된 것으로 기벽이 얇다. 어두운 무늬로 문양 효과를 낸 것도 있으며, 표면에 흑칠을 한 경우도 있다. 백색토기항아리의 경우 모두 아가리가 짧게 직립하다 끝이 뭉툭하게 밖으로 구부러지는 형태이다.
왕우묘에는 모두 4기의 구리거울이 부장되었다. 피장자 1인당 1장씩의 거울이 부장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곽의 북쪽 부장칸에는 수대경(獸帶鏡) 1장과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2장이 부장되었으며, 측곽에서도 내행화문경이 출토되었다. 피장자가 안치된 나무널 내부에 구리거울이 부장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나무널 내부 피장자의 신변 기물로 부장되는 삼한 사회와는 다른 부장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원의 광한군(廣漢郡)과 촉군(蜀郡) 공관에서 제작하여 직수입된 기년명(紀年銘) 칠기들이 다수 출토된 것은 주목된다. 여기에는 건무(建武) 21년(45), 건무 28년(52), 영평(永平) 12년(69) 등의 기년이 적힌 것이 있으며, 제작 공관과 공인이 각서로 상세히 명기된 것도 있다. 특히 영편 12년 옻칠소반에는 사신과 용호(龍虎)가 그려져 있다. 이외에 利王(이왕), 利韓(이한) 등의 길상구(吉祥句)가 적힌 옻칠잔과 옻칠소반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건대 1세기 중반에 조영되어 같은 1세기 후반까지 추가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낙랑 최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구덩식의 구조로 처음에는 부부 합장을 의도하여 설계되었지만, 도합 세 차례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고분이다.
발굴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조사단은 평양시에 주둔하던 육군 항공단에 의뢰하여 비행기를 띄워 발굴 현장의 항공사진을 촬영하였다. 아시아에서 발굴 현장을 항공 촬영한 것은 처음이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보고서 작성이라는 명목으로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으며, 현재는 도쿄대학 문학부에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왕우묘와 같이 개조된 나무덧널무덤은 부부 합장을 위한 추가장묘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낙랑에는 이러한 개조된 나무덧널무덤이 의외로 많은데, 이에 비해 중국 한(漢)나라의 무덤에는 나무덧널의 개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낙랑 나무덧널무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무덤에는 다른 귀틀무덤과 달리 쇠칼 1점을 제외하고는 철제나 청동제의 무기가 거의 부장되어 있지 않고, 거마구(車馬具)도 부장되어 있지 않은 특징을 보인다.
왕우묘에서 명문(銘文)이 적힌 유물이 발견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오관연왕우인(五官掾王旴印)’,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木製) 양면인(兩面印)과 사엽좌내행화문경(四葉座內行花文鏡), 세선식수대경(細線式獸帶鏡), ‘영평십이년(永平十二年, 서기 69)’이라는 1세기 후반의 기년명을 가진 칠기와 입큰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의 주인공이 오관연(五官掾)의 관직을 가진 왕우(王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오관연이라는 관직은 속관 중 최고인 공조(工曹) 다음 가는 관직으로, 토착 호족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칠기 · 입큰짧은목항아리 등의 유물과 무덤을 개조한 사실, 그리고 주인공의 왕우인 인장 등을 통해 학자들은 1세기 대 무덤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