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비밀리에 부촉을 받고 선암(仙巖) · 운암(雲巖) · 용암의 3암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그 중의 하나였다. 당시에는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크게 사세를 떨쳤다.
1314년(충숙왕 1)에는 무외국통(無畏國統)이 이절로 옮겨와서 크게 중창하였다. 즉, 1315년충숙왕은 제찰사(提察使) 한중희(韓仲熙) 등에게 전지를 내려 절을 경영하게 하였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朴孝修)에게 절을 중창하게 함에 따라 1318년에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하였다. 전당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金堂)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무외가 저축한 돈과 기타 모금으로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도금하였으며, 절에 대장경도 봉안하였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경(李白經)과 방우정(方于禎)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雪牋紙) 3만여 장과 옻칠한 함상자 140여 개를 만들었으며, 무외의 제자 대선사 승숙(承淑)과 중덕 일생(日生) 등은 강화도 판당(板堂)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 와서 신본(新本)과 구본(舊本)을 합하여 도합 600여함(函)을 만들어서 비단으로 잘 치장한 뒤에 새 전당에 봉안하였다.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방우정이 다시 임금의 명을 받아서 7일 동안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그러나 폐사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진주 용암사지 승탑을 비롯하여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진주 용암사지 석조지장보살좌상, 그 밖에도 석등 · 석비 등의 석재유물들이 산재되어 있으며, 해주정씨들이 세운 화덕재라는 정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