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각 분묘의 형태는 모두 장방형이다. 분묘의 내부구조형식으로는 돌덧널무덤[石槨墓] 13기와 널무덤[土壙墓] 3기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주 묘제는 앞트기식[橫口式] 기법이 가미된 돌덧널무덤이다.
출토유물로 보아 양 묘제 사이에 편년 차이는 없고, 공통적으로 목관(木棺)을 사용하고 있다. 분묘의 장축방향은 동서향과 남북향으로 나뉘며, 유구의 중첩(重疊) 상태로 보아 동서향의 분묘가 보다 앞선다. 머리향은 높은 산봉우리를 향하는 서침(西枕)과 북침(北枕)이다.
껴묻거리로는 자기류가 대부분이고, 여기에 청동제 식기류(食器類)와 철제가위 및 동경(銅鏡)·동곳 등이 약간 가미되는 일정한 조합 성향을 보인다. 매납(埋納)형태는 주로 목관과 돌덧널의 단벽(短壁) 사이에 자기류와 청동제 식기류가 배치되고, 동경·가위·동곳 등의 금속류는 목관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자기류에는 인천 경서동 녹청자요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정질(精質)의 녹청자(綠靑磁)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청자요지에서 제작된 정질의 청자가 있다. 또한 이 유적과 인접한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지에서 제작된 조질(粗質)의 백자와 청자가 함께 출토되어 주목된다.
이는 당시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즉, 장거리 운반이 어려운 도자기가 강진과 인천에서 용인까지 운송되어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에 장거리 교역이 실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유적의 편년은 출토유물로 미루어 11세기 중반부로 본다. 조질의 백자와 청자가 제작된 것으로 밝혀진 용인 서리 요지의 퇴적층위와 대비하면, ‘해무리굽백자층’ 다음 단계인 ‘조질백자층(粗質白磁層)’의 전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