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우복종택 ( )

주생활
유적
문화재
조선후기, 문신인 우복 정경세의 5세손인 정주원이 지은 주택.
이칭
이칭
우복종가(愚伏宗家)
유적/건물
건축 양식
주택
건립 시기
조선 후기
정면 칸수
5칸(사랑채)
측면 칸수
1칸(사랑채)
건물 층수
단층
규모
건물 8동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재(2018년 11월 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내용 요약

상주 우복종택(尙州 愚伏宗宅)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복(禹伏) 정경세(鄭經世)의 5세손인 정주원(鄭冑源)이 지은 주택이다. 정경세가 상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낙향하여 지은 건물은 초당과 계정인데, 이 중 초당은 종택 건립 이후에 대산루로 개축되었다. 종택은 대산루에서 남쪽으로 약 100미터 가량 떨어져 남북으로 흐르는 이안천을 바라보며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와 사당을 비롯해 사랑채, 안채, 아래채로 구성된 일곽과 남쪽에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묘로 구성된다.

정의
조선후기, 문신인 우복 정경세의 5세손인 정주원이 지은 주택.
건립 경위

상주 우복종택(尙州 愚伏宗宅)이 위치한 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로, 이곳은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출생지인 함창 율리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종택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은 그가 1600년대에 낙향한 이후 주1과 계정(鷄亭)을 짓고 이를 주2로 경영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는 출사(出仕)와 낙향을 거듭했던 당대의 여러 문인들이 자신의 근거지 주변에 별서를 두었던 행적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택은 이때의 초당과 계정에서 약 100여 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의 사후인 영조(英祖)대에 선생을 치하하기 위해 하사 받은 토지에 후손이 지은 것이다.

변천

우복 정경세가 우산리에 살기 시작된 것은 1600년대 초반이지만, 정경세의 종택은 여전히 그의 출생지인 함창 율리촌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함창의 종택이 우산리로 옮겨온 것은 영조에게 토지를 하사 받게 된 그의 4세손 정주원(鄭冑源, 1686~1756)에 의해서였다. 종택이 지어진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입재선생별집(立齋先生別集)』 10권, 연보(年譜)에 1743년(영조 19) 이전에 이미 조영되어 있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늦어도 1743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계기로 별서로 기능했던 초당과 계정의 성격은 종택에 딸린 별당 용도의 사랑채로 변하였을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종택의 변화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없고, 5세손인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 의해 정경세가 지었던 초당이 대산루(對山樓)로 고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1900년(광무 4)경 주3가 불타 다시 세웠으며, 1990년경 사당(祠堂)과 화장실 등을 보수하였다.

형태와 특징

우복종택은 우산리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인 이안천에 약 50미터 가량 떨어져 동향해 있다. 입구인 대문채에서부터 안채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경사가 있다. 1900년에 불탄 후 재건된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중간에 솟을대문 형식의 대문간(大門間)을 두었다.

대문채에 들어서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는 뒤편의 안마당과 높이를 맞추기 위해 경사면에 2단의 비교적 높은 기단을 쌓았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ㅡ자 형태로 구성된 홑처마 팔작지붕에 굴도리를 둔 5량가(五樑架) 형식의 건물이다. 내부는 정면 좌측에서부터 온돌 2칸의 큰 사랑방, 마루 2칸, 온돌 1칸의 작은 사랑방을 두었다. 사랑채의 정면에는 처마 밑으로 좁은 폭의 마루를 두고 계자각(鷄子脚) 난간(欄干)을 설치하였다. 산수헌(山水軒)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ㄴ자 형태의 안채는 사랑채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전체적으로 1단의 기단을 두었으나 부엌을 둔 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상부에 비교적 큰 다락을 두었다.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 부분은 측면 1칸 규모에 2칸의 부엌, 온돌 2칸의 안방, 온돌 1칸의 윗방을 둔 3량가(三樑架)이고,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는 부분은 측면 2칸의 규모에 정면 2칸의 대청마루와 온돌 2칸의 건넌방을 둔 5량가 형식이다. 두 부분 모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동향을 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웃방꺾음집의 구성과 유사하다.

안채의 북쪽에 위치한 아래채는 정면 1칸, 측면 5칸의 3량가 맞배지붕 건물이다. 서쪽에서부터 온돌방 2칸, 마루 1칸, 광 1칸, 뒤주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종택 북측에 연접하여, 대문간채에 들어와서 보았을 때 우측 방면에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전형적인 사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4를 개방하였고, 초익공(初翼工) 맞배지붕 형식이다. 전면에는 주5

별묘(別廟)주6는 종가 건물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별도의 터를 닦아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초익공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보다는 전체적인 규모가 작다. 사당과 별묘 역시 우복 종택과 같이 주7을 바라보며 동향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상주 우복종택은 별서로 경영되었던 초당과 계정 인근에 지어진 종택이라는 측면에서 종택 내외의 구성과 입지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정조(正祖)가 하사한 시문판(詩文板)을 소장하고 있고, 주8묘제(墓祭) 등 조선시대 제례문화(祭禮文化)가 현재까지 전승되는 등 역사적 · 민속적 · 건축적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원전

『우복선생별집(愚伏先生別集)』
『입재선생별집(立齊先生別集)』

단행본

『2021년 국가민속문화재(건조물) 정기조사』 4(문화재청, 2021)

논문

임찬식, 『상주 대산루 일곽의 조영과정과 건축적 성격에 관한 연구』(울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주석
주1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우리말샘

주2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 우리말샘

주3

대문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4

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 우리말샘

주5

널빤지로 만든 문. 우리말샘

주6

왕실에서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사친(私親)의 신주를 모시던 사당.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생모가 정실 왕후가 아닐 때, 또는 임금으로 추존(追尊)되기 전에 따로 모신 사당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7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서 발원해 함창읍 금곡리에서 영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방 하천. 우리말샘

주8

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배창현(울산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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