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홍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신임사화와 관련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722년(경종 2)
본관
단양(丹陽)
주요 관직
재령군수
관련 사건
신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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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후기 신임사화와 관련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단양(丹陽). 무과를 거쳐 벼슬길에 나가 여러 무관직을 역임한 뒤, 벼슬이 재령군수에 이르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고부터 조정은 연잉군(延仍君: 뒤에 英祖)의 세제 책봉문제, 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본격화되어, 소론에 의한 노론 축출사건인 이른바 신임사화가 발생하였다.

1722년(경종 2) 노론이었던 우홍채는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대신의 당여로서, 내시 장세상(張世相)의 집을 왕래하며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소론에 의하여 여러 차례 국문을 받은 끝에 죽음을 당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이른바 신임사화를 무옥(誣獄)으로 규정하고,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할 때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전고대방(典故大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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