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팔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서 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강원도 원주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켜 항쟁한 의병장.
이칭
이칭
용석(容錫), 복여(復汝), 삼계(三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사망 연도
1907년(순종 1)
본관
원주(原州)
출생지
충청북도 제천
관련 사건
원용팔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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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서 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강원도 원주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켜 항쟁한 의병장.
개설

본관 원주(原州), 자 복여(復汝), 호 삼계(三戒)이다. 본명은 용석(容錫)으로, 후일 바꾼 이름이 용팔(容八)이다.

원용팔(元容八)은 구한말 충청도와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896년(고종 33) 전기 의병 시기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 참여하였고, 러일전쟁이 끝나던 1905년(고종 42) 8월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중기 의병 시기(1904~1907) 선도적 의병장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 전기 의병 시기

원용팔은 1862년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가정리에서 출생하였다. 원용팔의 가계나 성장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형은 제천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한 원용정(元容正)이다.

원용팔은 형 원용정과 함께 이항로(李恒老)의 고제이던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따른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배양하였다. 특히 유중교 문하의 유생들이 1895년 을미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지자 그 해 윤 5월 2~3일 양일간 비상시국에 대처하기 제천 장담의 자양서사(紫陽書舍)에서 강회(講會)를 열었을 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원용팔은 이 모임에서 사우들과 함께 논의하여 비상시국에 정당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행동 방안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정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였다. 원용팔은 여주 일대에서 봉기한 심상희의진(沈相禧義陣)에 참여한 뒤 다시 제천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 중기 의병 시기

1905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침략 책동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원용팔은 같은 해 8월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원주 금마둔(金馬屯)에 있던 박수창(朴受昌)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한 끝에 그로부터 군자금과 화포 등의 군수품을 지원받았으며, 소를 잡아 거의의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天祭)를 지냈다. 이어 8월 16일(음 7월 16일) 원주 풍정(楓亭)에서 동지를 규합하였고, 명포수 최병덕(崔炳德)과 정재식(鄭在植)을 각각 좌, 우 총독장(總督將)으로 선임하였다. 또한 의병을 일으킨 명분을 천명하기 위해 여러 격문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렸고, 서울에 주재한 구미 각국, 청나라 공사관에는 일제의 죄상을 성토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일본공사관에는 국권침탈의 죄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별도로 보냈다.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는 일제의 국권침탈을 성토하고 의병에 동참해 주기를 요청하는 「격고문(檄告文)」을 발포하였다.

원용팔은 원주에서 주천을 거쳐 단양으로 행군하는 동안 포군 등을 소모하여 전력을 보강하였다. 8월 26일(음 7월 26일)에는 영춘으로 들어가 전군장 이정의(李正義), 수성장 이회승(李會升) 이하 소모장, 파수장, 참모종사, 서기 등 부서와 간부를 선임함으로써 의진의 편제를 갖추었다. 이어 영월, 마차(磨差, 현 영월군 북면), 정선, 홍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전력을 확충하였다. 이 무렵 의진의 규모는 2~3백 명 정도에 이르렀다.

  1. 체포와 순국

9월 24일(음 8월 26일) 홍천에서 횡성을 경유한 뒤, 사전에 약조한대로 원주 진위대의 호응 하에 원주를 점령하고자 활곡[活谷, 궁곡(弓谷)]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튿날 오히려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무너지고 몸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의병투쟁은 종료되었으나, 이후 을사조약 늑결로 야기된 삼남지방과 양서지방 등 항일의병의 전국적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원용팔은 원주로 압송된 뒤 10월 7일 다시 서울 평리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뒤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로 끌려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지만 대한 의사의 올곧은 기상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경성감옥에 수감된 뒤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1907년 3월 45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삼계유고(三戒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삼계유고(三戒遺稿)』
『한말의병자료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1989)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매천야록』(황현, 국사편찬위원회, 1955)
『한말 중기의병』(박민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한말 제천의병 연구』(구완회, 선인, 2005)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권영배, 『한국민족운동사연구』(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2), 나남출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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