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덕초(德初), 호는 겸산(兼山).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의 후손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해 서리계급이 됐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시와 글에 두루 능했고 특히 서예를 잘했다. 전서(篆書)·해서(楷書)에 뛰어났다고 한다. 오랫동안 규장각에 근무했으며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찬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이 내리는 상을 여러 번 받았다. 고종(高宗) 때에는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1853년(철종 4)에 최경흠(崔景欽)과 함께 중인문인의 시회(詩會)인 직하시사(稷下詩社)를 조직해 위항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857년(철종 8)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해내어 『풍요속선(風謠續選)』 이후 60년간의 위항문인의 시를 정리했다.
1862년(철종 13)에는 중인층의 전기인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편술하여 위항인 308명의 전기(傳記)을 모두 모아 성격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가장 방대한 위항인의 전기집(傳記集)을 이루어놓았다.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인물 중 이전 사람이 그 전기를 이미 기록해 놓은 것은 선택해 편집했고 전기가 없는 인물은 직접 써 책에 실었으므로 인용된 도서가 52종에 달한다.
또한, 당나라 이후의 근체시 가운데 해와 달, 꽃과 새 등을 소재로 지은 영물시 명편을 가려 뽑아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라는 이름으로 펴냈는데, 7,000수가 넘는 방대한 양의 시를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 시인 613명 중 370명을 위항시인에서 선정해 위항문학의 융성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밖의 저서로 『고금법어(古今法語)』와 『겸산필기(兼山筆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