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방숙(方叔)
취옹(醉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6년(선조 39)
사망 연도
1671년(현종 12)
본관
기계(杞溪: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
주요 관직
경기도관찰사|대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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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방숙(方叔), 호는 취옹(醉翁). 유영(兪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대의(兪大儀)이다. 아버지는 예조참의 유성증(兪省曾)이며, 어머니는 구준(具濬)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을 거쳐 사간으로 재직중 “명나라를 피하고 청나라에 사대(事大)의 예를 닦는 것이 마땅하다.”고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의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요청하였고, 또 북방과 관련한 7개 조항을 제출하여 채택되었다.

1652년(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어전에서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신(臣)이라 칭한 것은 아무 뜻 없는 망발이나, 사사로이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파직을 청하였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진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나 윤집(尹鏶)·권시(權諰) 등 여러 대신들의 힘으로 한달 만에 방환(放還)되었다. 현종초에 다시 복관되어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을 지내고 죽었다. 저서로는 『취옹집』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송자대전(宋子大全)』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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