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이다.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 유언경(庾彦卿)의 아들이다.
1143년(인종 21) 11월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1147년(의종 1) 12월 추밀원지주사 이부시랑(樞密院知奏事吏部侍郎)에 올랐고, 이듬해 윤8월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어 예부시를 주관하였으며, 12월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1149년 4월 비서감(秘書監), 1150년 12월 지추밀원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151년 4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있으면서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는데, 정서는 당시 왕의 동생으로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아 경계시되던 왕제(王弟) 대령후(大寧侯)와 긴밀한 접촉을 가져 의심을 받던 인물이었다. 같은 해 5월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12월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1152년 4월 수국사(修國史)에 이어 지공거로 예부시를 주관하였고, 12월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김존중(金存中)이 태자의 교육은 재상이 담당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여서 임명된 것이다.
1155년 12월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이부사(門下侍郎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로 있다가 별세하였다. 의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본래 학문이 뛰어나고,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고 강직하여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의종이 환관 정함(鄭諴)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뒤 왕이 여러 차례 설득하였지만 뜻을 굽히지 않아, 당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