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인(士寅), 호는 만롱(晩聾).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유현장(柳顯章)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박태경(朴泰慶)의 딸이다. 계부(季父)인 유원장(柳遠章)에게 입양되었으며, 유년시절에 아버지에게 수학하였다.
성대중(成大中)·조중진(趙重鎭) 등과 교유하였다. 1768년(영조 4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74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듬 해의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선발되어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에 합세하던 예조판서 구윤옥(具允鈺), 이조참판 이의익(李義翊) 등을 탄핵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이동형(李東馨)의 부정을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에서 은거하다가 1793년에 다시 서용되어 예조·이조의 참의, 성균관대사성을 포함한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외임으로 무안현감·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냈다.
재임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의 장례를 사비로 도와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해주유생들을 대신하여 청성사(淸聖祠)에 병자호란 무렵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瀋陽)에서 처형당한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을 배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00년 정조의 명으로 선조 유진동(柳辰仝)·유형(柳珩) 등 8인의 시장(諡狀)·행장·전(傳) 등을 수록한 『진양충의세편(晉陽忠義世編)』을 편찬하였다. 저서로 『만롱유고(晩聾遺稿)』 7권 7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