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숙(典叔), 호는 봉주(鳳洲). 군수 유영(兪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무랑 유대의(兪大儀)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유성증(兪省曾)이며, 어머니는 참봉 구준(具濬)의 딸이다.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고, 금오랑(金吾郎)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3년 상운찰방(祥雲察訪)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괴원(槐院: 승문원의 다른 이름)에 배속되어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전적에 올랐다.
1636년 정언으로 재직 중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고친 청 태조의 건국 축하에 참석했던 나덕헌(羅德憲) 등이 돌아오자, 이들을 참(斬)해 대의를 밝힐 것과 청의 국서(國書)를 받지 말 것, 팔도에 사신을 보내어 전쟁에 대비할 것 등 반청주전론(反淸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이어 다시 전적으로 체직되었다가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에 보임되었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비·빈과 봉림대군을 강화에 호종했고, 곧 호서순검사(湖西巡檢使)가 되어 전라도 지역에서 군사 모집과 군량 조달을 위해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는 배청파(排淸派)로 지목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향리(鄕里)에 은거했으며, 1640년 다시 예조정랑에 기용되었다. 2년 뒤 교리로 재임 중 전국에 전염병이 만연해 많은 백성들이 죽자, 지방의 신(神)에게 기도하기 위해 영남 지방을 다녀와서 시사육조(時事六條)를 임금에게 올려 받아들여졌다.
그 뒤 헌납·이조참의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병조참의·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4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승지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철저한 배청숭명파 노선을 걸었고, 호란이 끝난 뒤에도 참상을 잊지 말 것을 역설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