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순수(淳叟)이다. 문하시중 윤관(尹瓘)의 7대손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해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288년(충렬 14) 9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 김해장서기(金海掌書記)가 되었다가 비서랑(祕書郎)·직문한서(直文翰署)에 보임되었다. 충선왕 초에 좌정언에 임명되고, 이어 우사보(右思補)·내서사인(內書舍人)·선부의랑(選部議郎)에 전직되었다. 그 뒤 전라도 지방을 자세히 살피어 조사할 때 강직함이 알려져 도율령(都律令)으로 승직하였다.
충숙왕이 평소에 윤선좌의 이름을 듣고 즉위해 성균좨주에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케 하였다. 1314년(충숙 1) 윤3월 사헌집의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백원항(白元恒)과 더불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의하였다. 그 뒤 일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집의에 임명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이 왕을 폐하고 심왕 왕고(瀋王 王暠)를 대신 세우려고 하자, 힘써 반대하고 대간·문한(文翰)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계획을 좌절시켰다. 한편 왕이 원나라에 머문 지 5년이 되어 재정이 부족했는데, 심왕 왕고의 일당이 부고(府庫)를 봉하고 운반을 저지하였다. 이에 감찰관 조관(趙琯)을 움직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判典校)가 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을 겸했으며, 1331년(충혜왕 1) 이윤(伊尹: 중국 은나라 태종 때의 名臣)의 고사를 들어 앞당겨 치사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다시 계림윤(鷄林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에 제배(除拜)되었다가 치사하였다. 1343년 자녀들에게 가산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화목할 것을 훈계한 뒤 10월에 죽었다.
경학에 밝고, 노장(老莊)·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 표전(表箋)을 많이 지었다.